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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27일 토요일

비 소식도 예보된 4월의 마지막 토요일 저녁 시간대로 접어 드는군요!

우선 아래의 이미지를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상의 비행체들은 기체명과 비행시기가 순서대로 다음과 같이 정리 되며, 본 이미지는 NASA에서 발췌하였습니다. 공공연한 사이트 공개물이기에 저작권법 문제는 없을 줄로 알며, 이의 문제 발생시 본 포스팅은 삭제를 하게 될 것입니다. 본 포스팅이 보안, 군사, 안보 등의 문제에 위반 없이 우리 일반에도 공개된 자료이니만큼 자유로운 열람 가능할 줄로 알고  소개합니다. 

 < 다 음 >
001 X-1 벨로켓 비행기 1947
002 더글러스 D-558-II 1949
003 벨 X-2 Starbuster 1952
004  X-15 1959
005 XB-70 1964
006 록히드 YF-12 1965
007 NASA F-16XL-2 1965
008 수정 FA-18A 1999
009 NASA's X-43A 2004
010 NASA F-15B 항공 연구 테스트 베드 1993
011 '조용한'F-1B 2006
012 NASA의 FA-18B -ing

목사인 블로거가 이런 비행체에 대한 관심 포스팅을 하는 것은, 이미 미국 대학생들에 의해 개발 되어 날고 있을 날으는 자동차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며, 우리 공군력과 세계 각 국의 공군력이 지니는 위력 그리고 항공, 우주 분야에 대한 평소의 관심사에의 일종이니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블로거들은 없으시기 바랍니다. 

이미지와 간단 소개에서 보시듯, 작금 미국의 공군력은 일반의 상상을 초월하며, 이 모든 비행체들은 그대로 우주 항공개발에도 적용 되어 인류 전체를 위한 우주 개발에도 구체적으로 적용 되고 있는 줄 압니다. 이미 우주 쓰레기 문제가 엄청난 문제거리가 된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 하고 계속적으로 개발 중인 우주개발사에 대한 관심을 조금만 기울이신다면, 작금 우리 지구촌의 몸살 정도가 어느 정도이며, 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가에 대한 자기 정체성 또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될 줄로 압니다. 

이러한 때에 맞이하는 2013년도 4월 마지막 주일을 준비하는 오늘 4월 27일 오후는, 개성공단 파견 근무자들의 복귀 소식과 함께 씁쓸하게 막을 내리며 조용한 가운데 국제 사회와 세계 경제에 적지 않은 타격도 가져 오고 있다 하니, 우리 커뮤니터들은 이 시대적 난관이 속히 안정을 되찾을 수 있도록 응원 많이 하셔야 할 듯 합니다. 극단의 종국은 결국 양자의 파국이나 커다란 손실이 자명하거늘, 서로의 버티기와 한 번 해보자 식의 경쟁은 향후 어떤 민족적 손실을 가져 올 것인지 참 심려스럽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이런 범 민족적, 범 세계적 스트레스에도 불구하고 지존이니 엄존이니를 찾으며 정치, 군사력 강화와 그것만으로 문제가 완결 될 줄 알고 井低之蛙격 국가 운영을 해 가려는 6.26 세대의 老狐化와 젊은 지도자에의 愚昧政治化의 道는 금번 개성공단 폐쇄 조치의 현실화로 그 내면이 드러난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매우 애석한 일이며, 이제라도 진지하게 현실을 인식하며 좀 더 현명한 대화와 부드러운 합의로 나아가 민족사적 단절의 골이 더 깊어 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설상가상 백두산의 마그마라도 격노의 불을 뿜을라치면, 그 엄청나고도 상상 불가한 어려움을 어찌 홀로 감당할 것인지, 도대체 전 국민을 戰鬪的 百姓化함이 가한 일인지를 신중히 판단 해 볼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키부츠와 모샤브 그리고 전 국민의 군사적 의식 강화가 오늘의 북한이 갖는 그것과의 근본적인 차이는 또 어디에 기인한 것인지, 그 근본적인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솔직하게 역사 앞에서 물어야 할 일입니다. 

[I like you] 블로거는 분명 "Love one another"의 계명을 중시하는 의지의 표현으로 구축된 마인드가 분명하지만, 이 사랑의 개념은 신적 아가페를 희롱하며 무조건적 다고 다고식의 오해된 사랑을 포함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아가페적 사랑은, 그 내면에 공의가 포함된 사랑이라는 점을 어릴 때는 몰라도 장성하여서는 체득함이 순리이기 때문이죠.

아주 오래 전 夢中에 온 하늘을 뒤덮고 어디론가 비행하던 비행선단의 비행 모습이 현실에서 보이는 최악의 경우가 우리 한반도에서 펼쳐지지 않기를 애절히 간구할 뿐입니다! 

5월 6-8일에는 중요한 훈련이 전국적으로 펼쳐진다고 하는 소식들이 여기 저기서 전달 되어 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무 생각 없이 범죄행각을 벌이는 자들도 있다니, 분명 우리 살아 가는 세상은 요지경 세상이란 어느 가사 글이 사실에 다름 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합니다. 

비 소식도 예보된 4월의 마지막 토요일 저녁 시간대로 접어 드는군요!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은총 중에 거하시기를 희구합니다! 


20130427 17:06.



2013년 3월 14일 목요일

fb와 구플이 한걸음 더 나아 간다~

fb와 구플(Google+)이 서비스업을 하고 있군요! 
fb 타임라인의 경우는 순차적으로 변경 중이라고 하고
구플은 어느샌가 이미 약산의 변경이 보이는군요. 
사용자는 다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해당 SNS의 내용들은 어디론가 공유 되고 있겠죠?

이제는 SNS를 사용하면서 모든 사용자들과 하나가 되어 가는 시대!

모두의 선한 사용을 기대하며 긍정적으로 나아갈 일입니다!

님이 본 [I like you]를 방문하셨다면, 
https://www.facebook.com/seongsoo.park 를 찾아 안부 해 주셔도 좋습니다! ^^

2013년 3월 4일 월요일

경칩에 기억 난 6월의 개구리 이야기!

여기 저기서 경칩 소식과 함께 개구리 이미지들이 업로드 되고 있군요! 다소 계절적으론 다르지만, 6월의 어느 개구리 관련 블로깅 하였던 블로그 포스트 생각이 나기로 한 번 공유 해 봅니다! 

개구리도, 사람이 가까와 지면 다가 오는 情이 있나 싶을 정도로 신기했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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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gjhp3/140070827346


20130303 “하나님의 受洗” (눅3:21-38)


20130303 “하나님의 受洗” (눅3:21-38) 315/313장


누가는 상당한 학문적 수업을 쌓은 지성인으로, 직업은 ‘의사’였습니다. 당시의 학문 중심지였던 다소(Tarsus)에서 의술을 습득한 것으로 보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기록은 목격자들의 증언 자료에 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누가에 대해 ‘사랑받는 의원(골4:14)’으로,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사람(딤후4:11)‘으로 소개하였습니다. 

그가 기록한 또 하나의 사도행전을 통해 많은 성서신학자들은 누가가 ‘성령의 사역’과 ‘기도’에 대해 강조하였고 ‘여인에 대한 관심’을 부각시켰으며 ‘부활 후에 현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 하였음을 언급합니다. 나아가 ‘이방인에 대한 복음 전파와’와 ‘재산(富)에 대한 적절한 관리’가 강조 되어 ‘교회 공동체의 방향’을 잘 이끌어 주었음에 주목합니다.

특별히 누가복음은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인성과 감정 그리고 그 분의 기적, 비유, 교훈 등의 모든 행적에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인간미가 人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또한 거기에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능력과 의지가 잘 조화 되어 나타나고 있지요.

누가복음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뉘어 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선은 눅1:2-4:13에서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개’를 보게 되며,
눅4:14-9:50에서는 ‘인자의 갈릴리 사역’ 그리고
눅9:51-19:27에서는 ‘인자의 배척 당하심’과
눅19:28-24:53에서는 ‘인자의 죽음과 부활’등에 관해 잘 묘사 되어 있습니다.

말씀 각 부분 부분을 읽노라면,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인간과 함께 하셨고 어떤 환경에서 어떤 일들을 당하시고 어떤 대미를 장식하셨는지를 통해 ‘새로운 기다림’을 이 2013년에도 지속할 당위를 찾게 됩니다. 눅24:51-53을 읽어 보시면, 당시 예수그리스도를 경험하였던 그 목격자들의 증언에 근거한 예수 신앙 (기독 신앙)이 오늘 우리의 ‘의미’의 근거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인간이 되셔서 인간계에 오신 ‘하나님의 사역과 의미’를 인간의 지성과 체험 능력 안에서 경험할 guide book으로써 누가 복음을 대하는 것이며 이 지침이 되는 누가복음을 읽으면서 체험하게 되는 하나님의 touch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초월적 역사’ 의 運動인 셈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수세의 본을 보여주신 예수그리스도의 수세는 곧 하나님의 수세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람 touch를 초월한 인간의 하나님 touch를 읽고 보게 되는 셈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구원의 시초가 될 하나님의 방법 제시로써의 세례에 관한 문제를 통해 하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셨다는 논리와 하나님도 받으신 세례를 인간이 거부할 이유 없음에 대해 明示的으로 깨닫게 되는 빙거憑據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 하나는 아직 세례를 받지 못했거나 세례를 받지 않은 자 에 대한 입장이며 또 하나는 이미 세례를 받았거나 받은자(들)에 대한 것입니다.

우선 ‘아직’ 수세하지 못했거나 않은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두 가지의 경우입니다. 아직 믿음이 없어(not believe but faith) 수세를 망성이거나 거부하는 경우예요 전자는 믿음을 구하거나 갖게 되면 매우 순응적이고도 감격적으로 능동적인 수세의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희망이 보이는 모습이죠 허나 후자는 믿음을 가지려 하지도 믿음을 가지고자 하는 자를 향해서도 매우 배타적이고 적대적 자세를 취하곤 합니다. 이 의식 행위를 무시하거나 이상히 여기거나 배척하기도 하지요 절망적입니다.

전자가 희망적임은 기도를 통해, 성경 연구와 지속적인 예배를 통한 말씀으로 부터의 깨달음이 있다면 매우 순적하게 수세에 임할 자요 그리스도인으로써 온전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선 수세자는 저들을 위도하며 믿음 안에서 리드해 주는 친절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고백에 간증이 없거나 형식과 외식에 대한 가치 認知 하에 구원의 확신 없이 수세 할 겨우도 있으므로 스스로의 良心에 따라야 할 것이며 거짓된 수세는 무효 할 것입니다.

절망적인 후자의 경우는 사실 대책이 없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성령의 도우심과 스스로의 선택에 의할 수 밖에 없으므로 인간이 touch 할 수 없는 道 外的인 상황입니다. 그 어떤 성직 수행자도 따를 수 없어요. 불행한 경우이며 매우 안타까운 경우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들은 교만, 권위의식, 불필요한 명예의식, 대중을 의식하는 허영심, 말씀에 대한 배척심, 교회공동체를 향한 적대심, 부족함 없는 생활 환경, 수세 자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타종교와의 갈등에 대한 우려 ‘의미’를 두지 않음, 불확신 하나님 존재에 대한 인정을 하지만 긍정 수용은 하려 하지 않음 등입니다.

전자든 후자든 기억할 것은, 세례를 받기 전 ‘완벽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를 완벽한 믿음으로 규정할 것인가도 애매모호 하지만, 완벽한 믿음의 주체는 ‘나’ 이전에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이미 주신 믿음에의 반응으로 나아감이 세례의 실체임을 기억한다면, 세례의 핵심은 마음으로 믿는 바를 입으로 시인함의 행위적 묘식 행위이자 거룩한 교회공동체 앞에서의 신성한 예식이 비로소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세례’라는 형식과 그 세례를 통해 ‘성령과의 하나 됨’이라는 본질적인 내용이 사실은 세례를 통해 새 생명이 회복되는 가치를 가치 되게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세례를 받지 못한체 주저하고 망설이는 약한 믿음의 소유자는 속히 이 거룩한 예식의 가치를 위해 기도하며 수세에 임할 일이요 여전히 세례의 가치를 업수히 여기거나 훼방하려 하는 분이 있다면, 하나님의 엄존하심 앞에서 자기존재 이유와 생의 유한함을 성찰하실 일입니다.

다음으로 이미 수세자가 되신 분(들)의 경우입니다.

信者가 聖徒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존귀하고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이는 마치 애굽에서의 노예생활 중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입성한 선민이 됨과 같은 논리이니, 세상 그 어떤 물질적 요건으로나 이론적 지식적 사고로도 계산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변화의 통로가 되는 것이 세례 사건이거니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확신으로 세례 받은 성도과 구원함을 받은 성도로 이 세상을 순례함은 주지하는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세례 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광야 같은 세상에서 만나는 신앙의 저해 요인은 결코 만만한 것들이 아닙니다. 따라서 믿음생활 중에도 간혹 세례 당시의 신성함과 거룩함을 잊는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첫사랑의 순수와 감성을 망각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미 세례 받은 성도는 스스로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깨어 경성하며 성도의 마땅한 바 성결의 삶을 정진하므로써 성화의 자리에 이르도록 완주해야 할 것입니다.

앞선 수세 성도로써 나중 된 신앙의 후배를 향해 신앙의 모범과 건덕생활을 경주할 것이요 나아가 세례의 가치와 의미를 권하여 또 다른 수세 성도를 양산함에 힘 쓸 일입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니, 성령의 사람은 마땅히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사랑의 사람인가? 나는 희락의 사람이며 화평의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오래 참으며 자비롭고 양선함으로 덕을 베푸는가? 나는 충성스런 성도의 삶을 경주중이며 온유하고 겸손한지 나아가 절제의 삶을 충만히 살고 있는지 항상 스스로를 살필 일이며 우리의 심판장 되시는 주 예수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이를 때 “잘 했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인정받는 선한 열매 의 주인공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春3월 봄 계절에 맞는 이 생명의 계절에, 세례 받은 성도로서의 복된 자기 성찰이 충만하시기를 애심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당시 시대를 생각해 보십시오. 눅1:1-2을 보시면 시대적으로 참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color로 그려본다면 매우 어두운 시절이요, 日氣로 대비해 본다면 무척 흐리고 답답한 시대였던 상황입니다. 그 힘겹고 지루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통해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게 하셨습니다(눅1:3). 그의 메시지는 매우 단호하고도 단순했으며 청자로 하여금 심령을 움직이게 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눅1:7-14). 그의 선포 앞에서 경청하였던 무리(눅1:7)와 세리들(눅1:12)과 군병들(눅1:14), 그리 숱한 당대 백성들(눅1:15, 21)은 ‘거부할 수 없는 이 회개의 복음 증거’ 앞에서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눅1:21).

바로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 역시 세례를 받으러 요한에게 머리를 숙인 것입니다. 이 상황에 대해 마태는 세례 요한 자신이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하며 말린 모습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기술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3:14-15)” 하심으로서 神이 人間에게 머리 숙여 세례 받으심의 役事를 성취 하셨습니다.

洗禮는, 분명 구원의 예표입니다(벧전3:21).
세례는, 분명 성령과 하나 됨의 증거입니다(고전12:13).
세례는, 진정 그리스도와 합하여 그 그리스도의 옷을 입음입니다(갈3:27).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로 옷 입고 이 땅에 오신 완전하신 인간으로 세례의 현장에 동참 하셨습니다(눅3:21). 하나님께서는, 세례 받는 외적 신앙고백과 표현을 결단하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3:22)” 하는 성령강림을 표적화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 받음=죄 씻음 받음=구원(행22:16)’을 公式化 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는 이렇듯 귀하고 복된 ‘의미’와 ‘가치’와 ‘효험’과 ‘능력’을 동반하며, 하나님께서는 그렇기에 스스로 먼저 인간에게 세례 받으시는 ‘낮아짐’을 통해 ‘영생에 합당한 자’의 ‘세례 받을 당위’를 온 몸으로 力說해 주셨습니다.

3月 ‘고백의 달’에는 성도 여러분 각자의 ‘믿음의 고백’과 受洗의 役事, 세례 받음에의 회고와 상호 권면으로 受洗者와 그 결단이 넘치는, 역동의 계절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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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24일 일요일

김영한 교수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주”(Kyrios) 칭호]


역사적 예수에 대한 “주”(Kyrios) 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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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2.25 09:16   
[김영한 교수] 나사렛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 (54)
본지는 2013년 사순절을 맞아,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잠시 중단됐었던 김영한 박사(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초대 원장)님의 글 ‘나사렛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을 계속 이어서 게재합니다. 이 글은 지난 2008년 SBS가 다큐멘터리 ‘신의 길, 인간의 길’에서 “예수는 신화다”라는 주장을 여과 없이 방영한 데 대해, 김영한 박사님이 정통 기독교 신학에 기초해 반박하고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에 관하여 역사적인 자료에 기반된 증거를 제시하고자 작성한 것입니다. -편집자 주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머리말

“퀴리오스”(Kyrios, 주, 主)라는 용어는 신약시대에 유명한 인물에게 존경을 나타내는 칭호로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헬라 이방세계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로마 황제나 이방신들, 예컨데 사랍시스(Sarapsis)나 이시스(Isis) 등을 가르키는 의미로까지 확대되어 사용되었다(마르틴 헹엘, 『하나님의 아들』, 164). 그러나 유대인들의 70인역에서는 히브리어로 아도나이(Adonai)를 가르키는 말로써 자주 사용되었다. 이것은 야웨(Jaweh)의 대체어로 사용되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에 대한 특별한 호칭으로 “주”(퀴리오스, Kyrios)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존경을 나타내는 선생(Sir)이라는 표현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 칭호는 존경 이상의 의미를 나타낸다. “주”(the Lord, ho kyrio)라는 칭호는 부활하신 예수에게 적용되었다. 70인역에서 이처럼 사용된 칭호가 부활한 예수에게 적용될 때에는 신적 본성의 의미가 아주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된다(Gutherie, 『신약신학』, 331).
1. 마가의 사용: 예수는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셔서 성에 입성하기 위한 나귀를 구하러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나귀를 사용하는 자를 묻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주”라고 칭하도록 하신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막 11:3). 여기서 “주”(퀴리오스)라는 존칭을 사용하심으로써 예수는 자기 자신을 구약에서 약속된 다윗이라고 소개하신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군중들은 예수를 따르면서 환호한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막 11:9-10). 여기서 군중들이 사용하는 ”주“라는 존칭은 다윗의 영광으로 오시는 정치적 메시아를 지칭하고 있다.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실 때 시편을 인용하시면서, 메시아인 그리스도가 단지 “다윗의 자손”이라는 유대인의 편견을 교정하시고자 하신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막 12:35-37). 예수는 자신의 사역이 메시아 사역이라는 의식(意識)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가 나사렛 예수라는 인물로서 왔다고 보는 것은 옳다. 그러나 예수는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신다.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이라면 왜 다윗은 메시아를 주라고 호칭했는가 질문하신다. 예수는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하신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예수는 시편의 본래 구절의 “여호와”를 “주”로 바꾸어 인용하시고 있다. 그는 이 구절을 성부가 그 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해석하신다. 이 구절은 아주 오래된 시편으로서, 유대 임금의 대관식 때 쓰던 예배의식문의 부분이었던 것으로 추측한다(성경전서 독일성서 공회판, 967). 성전 예언자가 자기 주인 왕에게 여호와께서 그를 나라를 관장하는 자신의 대리자로 세우셨음을 확실히 하는 말씀이다. 이러한 위엄은 그가 하나님의 우편이라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음으로써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발등상이란 굴복한 적의 목을 발로 밟던, 옛 중동의 관습에 근거한다. 예수는 이 시편 말씀을 인용하심으로써 자신이 단지 다윗의 후손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막 12:37). 후기 유대교에서는 이 시편을 사람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에 관련시켰다. 초대교회는 이 시편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과 높아지심에 관련시킨다.   
2. 누가의 사용: 부활하신 예수를 주로 호칭
누가는 예수를 즐겨 “주”(호 퀴리오스, ho kyrios)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세례자 요한 탄생 기사에서 하나님을 “주”로 묘사하고 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제사장 사가랴가 하나님의 제단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때 천사가 나타난다: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눅 1:9-11). 하나님의 성소를 “주의 성소”, 하나님의 사자를 “주의 사자”라고 호칭하고 있다. 천사는 사가랴의 아내에게 여태까지 수태하지 못한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나을 것인데,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고 명한다: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여기서 누가는 하나님을 “주”라고 호칭하고 있다. 
누가는 예수의 부활과 관련하여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엠마오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엠마오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져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주”라고 호칭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눅 24:33-34). 엠마오의 두 제자도 자기들이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증언하였다(눅 24:35). 
3. 마태의 사용: 그리스도는 다윗의 주
마태에 의하면 예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과 관련하여, 사람들이 자신을 “주”라고 호칭하는데 이 호칭만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들어간다고 가르치고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7:21-22). 이 때의 “주”라는 호칭도 존경의 호칭보다는 일반적인 주인이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셔서 성에 입성하기 위하여 나귀를 구하러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나귀 사용자인 자신을 “주”라고 칭하신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마 21:3). 이때의 주는 존경의 호칭이기 보다는 일반적인 주인이라는 뜻이다(Gutherie, 333).
마태에 의하면 예수는 바리새인과의 대화에서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지만 실은 다윗의 “주”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예수는 바리새인이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하는 것을 들으시고 시편 110편 1절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신다. “이르시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마22:43-46). 예수는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다면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 이상이며 “다윗의 주”라고 바리새인들을 가르치신다. 여기서 “주”란 신성을 표현하지는 않으나 메시아 직분의 존엄성을 나타낸다(Gutherie, 332). 그리고 “주”란 칭호는 예수의 독립된 하늘의 직분을 가리키는 데 적용된다(Ferdinand Hahn, The Titles of Jesus in Christology, 113)
4, 요한의 사용: 지상적 예수를 주, 부활하신 주를 하나님으로 호칭
1) 지상적 예수를 주로 호칭
복음서 저자 요한은 예수의 복음 사역 초기에 예수께서 직접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세례를 준 것인데, 예수의 세례를 베푸신 것이 세례자 요한의 세례보다 많다는 사실을 바리새인이 들은 사실에 접하였다. 이 사실을 기록할 때 사도 요한은 “주”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요 4:1).
요한은 디베랴 바다 건너편 광야에서 예수께서 축사하신 후 오천명이 떡을 먹던 곳을 표시하는 장면에서 예수에 대하여 “주”라는 존칭을 하고 있다: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요 6:23).
사도 요한은 베다니에 거주했던 죽은 나사로의 다시 살아남에 대한 사실을 기록함에 있어서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를 소개하고 있다. 그녀가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씻긴 사실에 대하여 기록할 때에 요한은 예수를 “주”로 칭하고 있다: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요 11:2).
2) 부활하신 예수를 주 하나님으로 호칭 : 종교다원주의를 거부하는 독특성
사도 요한은 예수 부활을 의심하던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과 자신에게 나타난 체험을 한 후, 도마가 예수를 “주”라는 호칭으로 부른 것을 기록하고 있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이 도마의 고백에서 나사렛 예수의 정체성은 주(퀴리오스)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이라는 신적 본성의 차원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는 역사적 예수가 성자(the Son)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의 모습에서 삼위일체의 모습을 잠재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종교사적인 신적 인물인 제우스(Zeus), 사랍시스(Sarapsis)나 이시스(Isis) 등에 비견할 수 없는 탁월한 존재로 드러난다. 그는 불교에서의 부처나 유교에서의 공자나 이슬람교의 마호메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그는 신적 존재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하나님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적 예수를 앎에 있어서 두 가지 차원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는 역사적 차원으로서 비교종교학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역사적 종교적 인물로서의 예수다. 이 차원에서 예수는 불교의 부처와 유교의 공자나 이슬람의 마호멧과 비교될 수 있다. 그는 하나의 우리와 같은 진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종교적인 인물이었고 하나님을 추구한 선생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역사적 예수의 진실은 다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의 차원이 있다. 이것은 역사를 넘어서는 초역사적 차원이다. 이 차원은 역사적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신앙적 인식의 차원이다. 이 차원에서 드러나는 그의 모습은 그는 하나님의 아들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성자 하나님, 삼위일체의 2위이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역사적 예수의 정체성이다. 이 정체성은 이미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요 17장)에서 그가 드렸던 대제사장적 기도에서 일견될 수 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예수는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이미 영원 전에 성부 하나님과 함께 삼위일체의 영광 속에 계셨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요 17:8). 믿는 신자들은 역사적 예수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아논 줄을 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성경은 오늘날 종교다원주의 시대에서도 예수 주 되심의 유일성을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역사 마지막에 모든 인간과 종교의 교주들, 영매(靈媒)들이 유일한 하나님의 흰 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묵시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본 것을 기록하고 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1-15). 여기서 보좌에 앉아서 심판하신 자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책과 행위책(사망책)을 가지셨다. 행위책에 기록된 자는 자기 행위에 따라 구원을 얻으려는 자들이나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그의 십자가 대속의 피를 믿는 자들이다. 
결론: 퀴리오스 칭호는 나사렛 예수의 유일성을 드러냄
퀴리오스 칭호는 예수의 존귀를 나타낸다. 퀴리오스 칭호는 부활하신 예수에게 붙은 칭호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부활했을 때 그의 제자들은 그를 퀴리오스라는 당시의 종교사회학적 존칭어를 사용하여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칭호는 예수를 하나님으로 승귀시키고 있다. 신자들에게 퀴리오스 칭호는 신자의 삶의 모든 측면을 관할하는 예수의 절대적 주권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당시 헬라의 신적 존재나 로마 황제에게 붙는 칭호였으나, 초대교회 신자들은 이를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오로지 부활하신 예수에게만 독특하게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퀴리오스 칭호는 예수의 유일성과 탁월성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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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61586 에서 전문 재인용 하였으며 신앙, 신학, 학술 등에서 저작권법에 저촉 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선용 되기 원합니다. 

2013년 1월 31일 목요일

消日이란 말은 삼가해야 할 말이었음을 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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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굳이 아는 체라도 해 보라면,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7&contents_id=15642 를 통하여 그 대강을 알 뿐입니다.” 라고 함이 진솔한 응답일 것입니다. 

그는 “消日이란 말은 참으로 해서는 아니 될 말이다. 나는 소일하며 살지 않았다” 했다니, 우리는 그 말을 찾아 볼 필요가 있으며, 이에 그 말이 의미하는 ①하는 일 없이 세월(歲月)을 보냄 ②어떤 일에 마음을 붙이어 심심하지 않게 시간(時間)을 보냄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게 됩니다. 

위 ①에 의하면 분명 소일이란 말은 사용해서는 곤란합니다. 허나 ②에 의하면 이 말은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 듯 합니다. 다만, 이덕무의 견해가 ①에 따르는 말로 당대에 이해되었다 하니 긍정적으로 수용하여 가능하다면 이런 용어는 사용치 않음이 ②의 어의와는 별개로 요청되지 싶습니다.

어제 페부커는 현대 교회 안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지도자 한 분의 머슴론 사용 삼가에 대한 페부킹을 하였고 이에 불면지간의 페부커로부터 견해를 묻는 댓글을 받았습니다. 이에 다소 호흡을 고르는 동안 스스로 댓글이 사라진 것을 보았습니다. 자칫 삼가야 할 소일이란 단어가 일반에 해당한다면, 머슴론은 목회자들이 삼가야 할 마음이 언어면 족하다는 생각이 본 포스팅을 하게 되었습니다.

페부커의 글 하나 의견 하나 하나가 단지 하루 이틀에 가벼이 업데이트 되는 것은 결코 아니란 점을 커뮤니터들께서는 느끼시리라 자위합니다. 머슴같이 일하는 그 정신은 좋으나 이 점이 지나치게 부각되면 자칫 오해를 살 일이 있으며, 이는 공동체적으로 지나치게 강조될 사항은 아니란 점을 강변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니 이후로 이 문제에 대해 재론이 있다면 그야말로 소일①에 해당하는 자라 하렵니다. 그렇다고 ②에 해당하니 나는 정당하다는 변명같은 응답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페부커는 아직도 온라인 커뮤니티에 부족한 바가 많으며 오프라인에서도 모자란 점 많기로 온.오프라인을 무론하고 아직도 섭렵해야 할 우리 사는 이야기들에 스스로 접속 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새벽 시간에 페부커는 https://www.facebook.com/groups/394962370522925/
[32/20130201]를 묵상하였습니다. 모든 인생은, 온 세상이 하나님께 속한 줄을 알아 그 하나님을 경외함이 마땅할 것이며, 왕이든 머슴이든 소일 중인 사람이든 오늘도 열심히 자기에게 주어진 그 어떤 일들(악한 일을 하는 자는 돌이켜 회개하고 다시는 그 일을 하지 않아야 할 것 입니다)을 행하는 사람이든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서로를 대하여 화평하고 거룩하게 행한다면, 우리 사는 지구촌이 곳 하나님 주신 에덴동산의 확대된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顯現일 것 입니다. 이를 저해하는 그 어떤 惡한 생각과 行爲는 곧 하나님의 공의로써 심판 받음이 마땅 할 것입니다.

惡은 모양이라도 버리라 하신 말씀을 기얻하며, 오늘도 善한 일을 行하기에 귀히 스임 받는 복된 페부커 제위이기를 축원합니다! 샬롬~ 그리고 샬롬!

2013년 1월 30일 수요일

Strong people, Weak people!


Strong people affirm the strengths of other.
 Weak people attack the strengths of oth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