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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24일 일요일

김영한 교수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주”(Kyrios) 칭호]


역사적 예수에 대한 “주”(Kyrios) 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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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2.25 09:16   
[김영한 교수] 나사렛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 (54)
본지는 2013년 사순절을 맞아,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잠시 중단됐었던 김영한 박사(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초대 원장)님의 글 ‘나사렛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을 계속 이어서 게재합니다. 이 글은 지난 2008년 SBS가 다큐멘터리 ‘신의 길, 인간의 길’에서 “예수는 신화다”라는 주장을 여과 없이 방영한 데 대해, 김영한 박사님이 정통 기독교 신학에 기초해 반박하고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에 관하여 역사적인 자료에 기반된 증거를 제시하고자 작성한 것입니다. -편집자 주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머리말

“퀴리오스”(Kyrios, 주, 主)라는 용어는 신약시대에 유명한 인물에게 존경을 나타내는 칭호로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헬라 이방세계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로마 황제나 이방신들, 예컨데 사랍시스(Sarapsis)나 이시스(Isis) 등을 가르키는 의미로까지 확대되어 사용되었다(마르틴 헹엘, 『하나님의 아들』, 164). 그러나 유대인들의 70인역에서는 히브리어로 아도나이(Adonai)를 가르키는 말로써 자주 사용되었다. 이것은 야웨(Jaweh)의 대체어로 사용되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에 대한 특별한 호칭으로 “주”(퀴리오스, Kyrios)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존경을 나타내는 선생(Sir)이라는 표현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 칭호는 존경 이상의 의미를 나타낸다. “주”(the Lord, ho kyrio)라는 칭호는 부활하신 예수에게 적용되었다. 70인역에서 이처럼 사용된 칭호가 부활한 예수에게 적용될 때에는 신적 본성의 의미가 아주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된다(Gutherie, 『신약신학』, 331).
1. 마가의 사용: 예수는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셔서 성에 입성하기 위한 나귀를 구하러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나귀를 사용하는 자를 묻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주”라고 칭하도록 하신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막 11:3). 여기서 “주”(퀴리오스)라는 존칭을 사용하심으로써 예수는 자기 자신을 구약에서 약속된 다윗이라고 소개하신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군중들은 예수를 따르면서 환호한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막 11:9-10). 여기서 군중들이 사용하는 ”주“라는 존칭은 다윗의 영광으로 오시는 정치적 메시아를 지칭하고 있다.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실 때 시편을 인용하시면서, 메시아인 그리스도가 단지 “다윗의 자손”이라는 유대인의 편견을 교정하시고자 하신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막 12:35-37). 예수는 자신의 사역이 메시아 사역이라는 의식(意識)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가 나사렛 예수라는 인물로서 왔다고 보는 것은 옳다. 그러나 예수는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신다.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이라면 왜 다윗은 메시아를 주라고 호칭했는가 질문하신다. 예수는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하신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예수는 시편의 본래 구절의 “여호와”를 “주”로 바꾸어 인용하시고 있다. 그는 이 구절을 성부가 그 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해석하신다. 이 구절은 아주 오래된 시편으로서, 유대 임금의 대관식 때 쓰던 예배의식문의 부분이었던 것으로 추측한다(성경전서 독일성서 공회판, 967). 성전 예언자가 자기 주인 왕에게 여호와께서 그를 나라를 관장하는 자신의 대리자로 세우셨음을 확실히 하는 말씀이다. 이러한 위엄은 그가 하나님의 우편이라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음으로써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발등상이란 굴복한 적의 목을 발로 밟던, 옛 중동의 관습에 근거한다. 예수는 이 시편 말씀을 인용하심으로써 자신이 단지 다윗의 후손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막 12:37). 후기 유대교에서는 이 시편을 사람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에 관련시켰다. 초대교회는 이 시편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과 높아지심에 관련시킨다.   
2. 누가의 사용: 부활하신 예수를 주로 호칭
누가는 예수를 즐겨 “주”(호 퀴리오스, ho kyrios)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세례자 요한 탄생 기사에서 하나님을 “주”로 묘사하고 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제사장 사가랴가 하나님의 제단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때 천사가 나타난다: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눅 1:9-11). 하나님의 성소를 “주의 성소”, 하나님의 사자를 “주의 사자”라고 호칭하고 있다. 천사는 사가랴의 아내에게 여태까지 수태하지 못한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나을 것인데,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고 명한다: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여기서 누가는 하나님을 “주”라고 호칭하고 있다. 
누가는 예수의 부활과 관련하여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엠마오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엠마오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져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주”라고 호칭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눅 24:33-34). 엠마오의 두 제자도 자기들이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증언하였다(눅 24:35). 
3. 마태의 사용: 그리스도는 다윗의 주
마태에 의하면 예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과 관련하여, 사람들이 자신을 “주”라고 호칭하는데 이 호칭만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들어간다고 가르치고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7:21-22). 이 때의 “주”라는 호칭도 존경의 호칭보다는 일반적인 주인이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셔서 성에 입성하기 위하여 나귀를 구하러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나귀 사용자인 자신을 “주”라고 칭하신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마 21:3). 이때의 주는 존경의 호칭이기 보다는 일반적인 주인이라는 뜻이다(Gutherie, 333).
마태에 의하면 예수는 바리새인과의 대화에서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지만 실은 다윗의 “주”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예수는 바리새인이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하는 것을 들으시고 시편 110편 1절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신다. “이르시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마22:43-46). 예수는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다면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 이상이며 “다윗의 주”라고 바리새인들을 가르치신다. 여기서 “주”란 신성을 표현하지는 않으나 메시아 직분의 존엄성을 나타낸다(Gutherie, 332). 그리고 “주”란 칭호는 예수의 독립된 하늘의 직분을 가리키는 데 적용된다(Ferdinand Hahn, The Titles of Jesus in Christology, 113)
4, 요한의 사용: 지상적 예수를 주, 부활하신 주를 하나님으로 호칭
1) 지상적 예수를 주로 호칭
복음서 저자 요한은 예수의 복음 사역 초기에 예수께서 직접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세례를 준 것인데, 예수의 세례를 베푸신 것이 세례자 요한의 세례보다 많다는 사실을 바리새인이 들은 사실에 접하였다. 이 사실을 기록할 때 사도 요한은 “주”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요 4:1).
요한은 디베랴 바다 건너편 광야에서 예수께서 축사하신 후 오천명이 떡을 먹던 곳을 표시하는 장면에서 예수에 대하여 “주”라는 존칭을 하고 있다: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요 6:23).
사도 요한은 베다니에 거주했던 죽은 나사로의 다시 살아남에 대한 사실을 기록함에 있어서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를 소개하고 있다. 그녀가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씻긴 사실에 대하여 기록할 때에 요한은 예수를 “주”로 칭하고 있다: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요 11:2).
2) 부활하신 예수를 주 하나님으로 호칭 : 종교다원주의를 거부하는 독특성
사도 요한은 예수 부활을 의심하던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과 자신에게 나타난 체험을 한 후, 도마가 예수를 “주”라는 호칭으로 부른 것을 기록하고 있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이 도마의 고백에서 나사렛 예수의 정체성은 주(퀴리오스)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이라는 신적 본성의 차원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는 역사적 예수가 성자(the Son)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의 모습에서 삼위일체의 모습을 잠재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종교사적인 신적 인물인 제우스(Zeus), 사랍시스(Sarapsis)나 이시스(Isis) 등에 비견할 수 없는 탁월한 존재로 드러난다. 그는 불교에서의 부처나 유교에서의 공자나 이슬람교의 마호메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그는 신적 존재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하나님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적 예수를 앎에 있어서 두 가지 차원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는 역사적 차원으로서 비교종교학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역사적 종교적 인물로서의 예수다. 이 차원에서 예수는 불교의 부처와 유교의 공자나 이슬람의 마호멧과 비교될 수 있다. 그는 하나의 우리와 같은 진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종교적인 인물이었고 하나님을 추구한 선생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역사적 예수의 진실은 다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의 차원이 있다. 이것은 역사를 넘어서는 초역사적 차원이다. 이 차원은 역사적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신앙적 인식의 차원이다. 이 차원에서 드러나는 그의 모습은 그는 하나님의 아들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성자 하나님, 삼위일체의 2위이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역사적 예수의 정체성이다. 이 정체성은 이미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요 17장)에서 그가 드렸던 대제사장적 기도에서 일견될 수 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예수는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이미 영원 전에 성부 하나님과 함께 삼위일체의 영광 속에 계셨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요 17:8). 믿는 신자들은 역사적 예수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아논 줄을 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성경은 오늘날 종교다원주의 시대에서도 예수 주 되심의 유일성을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역사 마지막에 모든 인간과 종교의 교주들, 영매(靈媒)들이 유일한 하나님의 흰 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묵시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본 것을 기록하고 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1-15). 여기서 보좌에 앉아서 심판하신 자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책과 행위책(사망책)을 가지셨다. 행위책에 기록된 자는 자기 행위에 따라 구원을 얻으려는 자들이나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그의 십자가 대속의 피를 믿는 자들이다. 
결론: 퀴리오스 칭호는 나사렛 예수의 유일성을 드러냄
퀴리오스 칭호는 예수의 존귀를 나타낸다. 퀴리오스 칭호는 부활하신 예수에게 붙은 칭호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부활했을 때 그의 제자들은 그를 퀴리오스라는 당시의 종교사회학적 존칭어를 사용하여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칭호는 예수를 하나님으로 승귀시키고 있다. 신자들에게 퀴리오스 칭호는 신자의 삶의 모든 측면을 관할하는 예수의 절대적 주권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당시 헬라의 신적 존재나 로마 황제에게 붙는 칭호였으나, 초대교회 신자들은 이를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오로지 부활하신 예수에게만 독특하게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퀴리오스 칭호는 예수의 유일성과 탁월성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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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61586 에서 전문 재인용 하였으며 신앙, 신학, 학술 등에서 저작권법에 저촉 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선용 되기 원합니다. 

2013년 1월 31일 목요일

消日이란 말은 삼가해야 할 말이었음을 書하다.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444054248999280&set=a.111791852225523.16059.100001841278334&type=1&the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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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굳이 아는 체라도 해 보라면,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7&contents_id=15642 를 통하여 그 대강을 알 뿐입니다.” 라고 함이 진솔한 응답일 것입니다. 

그는 “消日이란 말은 참으로 해서는 아니 될 말이다. 나는 소일하며 살지 않았다” 했다니, 우리는 그 말을 찾아 볼 필요가 있으며, 이에 그 말이 의미하는 ①하는 일 없이 세월(歲月)을 보냄 ②어떤 일에 마음을 붙이어 심심하지 않게 시간(時間)을 보냄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게 됩니다. 

위 ①에 의하면 분명 소일이란 말은 사용해서는 곤란합니다. 허나 ②에 의하면 이 말은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 듯 합니다. 다만, 이덕무의 견해가 ①에 따르는 말로 당대에 이해되었다 하니 긍정적으로 수용하여 가능하다면 이런 용어는 사용치 않음이 ②의 어의와는 별개로 요청되지 싶습니다.

어제 페부커는 현대 교회 안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지도자 한 분의 머슴론 사용 삼가에 대한 페부킹을 하였고 이에 불면지간의 페부커로부터 견해를 묻는 댓글을 받았습니다. 이에 다소 호흡을 고르는 동안 스스로 댓글이 사라진 것을 보았습니다. 자칫 삼가야 할 소일이란 단어가 일반에 해당한다면, 머슴론은 목회자들이 삼가야 할 마음이 언어면 족하다는 생각이 본 포스팅을 하게 되었습니다.

페부커의 글 하나 의견 하나 하나가 단지 하루 이틀에 가벼이 업데이트 되는 것은 결코 아니란 점을 커뮤니터들께서는 느끼시리라 자위합니다. 머슴같이 일하는 그 정신은 좋으나 이 점이 지나치게 부각되면 자칫 오해를 살 일이 있으며, 이는 공동체적으로 지나치게 강조될 사항은 아니란 점을 강변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니 이후로 이 문제에 대해 재론이 있다면 그야말로 소일①에 해당하는 자라 하렵니다. 그렇다고 ②에 해당하니 나는 정당하다는 변명같은 응답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페부커는 아직도 온라인 커뮤니티에 부족한 바가 많으며 오프라인에서도 모자란 점 많기로 온.오프라인을 무론하고 아직도 섭렵해야 할 우리 사는 이야기들에 스스로 접속 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새벽 시간에 페부커는 https://www.facebook.com/groups/394962370522925/
[32/20130201]를 묵상하였습니다. 모든 인생은, 온 세상이 하나님께 속한 줄을 알아 그 하나님을 경외함이 마땅할 것이며, 왕이든 머슴이든 소일 중인 사람이든 오늘도 열심히 자기에게 주어진 그 어떤 일들(악한 일을 하는 자는 돌이켜 회개하고 다시는 그 일을 하지 않아야 할 것 입니다)을 행하는 사람이든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서로를 대하여 화평하고 거룩하게 행한다면, 우리 사는 지구촌이 곳 하나님 주신 에덴동산의 확대된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顯現일 것 입니다. 이를 저해하는 그 어떤 惡한 생각과 行爲는 곧 하나님의 공의로써 심판 받음이 마땅 할 것입니다.

惡은 모양이라도 버리라 하신 말씀을 기얻하며, 오늘도 善한 일을 行하기에 귀히 스임 받는 복된 페부커 제위이기를 축원합니다! 샬롬~ 그리고 샬롬!

2013년 1월 30일 수요일

Strong people, Weak people!


Strong people affirm the strengths of other.
 Weak people attack the strengths of others.

하늘 위로 날아 가는 저 굉음!

하늘 위로 날아 가는 저 굉음!
우리의 KSLV-1일까? ATLAS 5 시리즈물 가운데 하나일까?


이제는 전국적으로 흥분이 잦았을까 그 뒤진 흥분의 지구촌 저 편에서는 '씨~익' 웃으며 마치 어린 아이들 보듯 할 고참들도 있다는 점을 우리 겨레가 깊이 알아야 할 일이려니 합니다. 현각은 20130131 10:40을 지나고 있으며, 예의 그 굉음은 수 분 전에 블로거의 머리를 어지럽히고 날아 갔네요! ^^

구플 블로거 디자인을 섭렵한다는 것은

구플 블로거 디자인을 섭렵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을 온 몸으로 흡입하는 격입니다! 끝 없는 디자인으로의 유혹도 감출 수 없구요! 편의성과 하비리적인 가젯 추가와 템플릭과 에디터의 조화로운 배치로 빚어내는 블로거 디자인의 완성을 위해서는, 여간 정성과 샤프함으로는 결코 쉽지 않다는 결론이지요.

다소 촌티 나는 모양새지만, 왕초보임을 감추지 않고 우선 디자인 변경을 해 봅니다!

step by step~ ^^

나로호 발사 有感!

나로호 발사 전 10분.

외출을 해야 할 형편이었으나 특별히 시청 중이던 방송은 이제 잠시 후면 그 세 번의 도전 비행을 하게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를 어쩌나!

아내를 의자에 지그시 앉혀 어깨를 주무르며 함께 시청하기로 하고 화면을 보게 된 것은 7분 정도 -timing을 카운트 하는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약 3분여 남은 시각이 되었을 때, 도저히 믿기 어려운 가슴 두근거림이 시작 되었습니다. 약간의 통증도 있었다면 이해 못할 분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고 있던 화면에서는 드디어 '0'가 모니터 되었고, 드디어 비상하는 나로호! 사실 카운트 0과 비상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판단일 것입니다. 아뭏든 연무와 수증기에 가린 비행체는 시간 차를 두고 드디어 비상하여 점점 높이 올라 갔고, 21:00 뉴스는 그 사실을 실시간으로 '이상무'라는 상황 보고 보도를 잘 해 주었습니다. 

내일 새벽이면 우리 대전 기지국과의 교신이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최종 발사 성공은 선포 되는 것이라니, 남은 시간들 함께 모니터 하는 대열에 있으면 좋겠으나 좀 오버한다 싶어 그만 두려 합니다. 

현각 22:00을 지나고 있군요......(이렇게 타이밍이 맞는 것도 쉽진 않겠죠? ^^)

블로거는 발사 이후 지난 2006년도 2월 10일자로 부여 받은 KARI 우주인증을 깊숙이서 꺼내 들었습니다. 고유번호 KARI No.20060210. 특별한 법적, 행정적 효능은 없으나, 우리 KARI에서 부여 해 주신 명예우주인증입니다! 아마도 이 증을 소유하신 분은 이것이 무슨 얘긴지들 아실것입니다. ^^

나로호의 비상  이후 이 분야에 야기 될 경제적 창출 효과는 좀 더 가시화, 가속화 될 것을 예상들 하는 분위기입니다. 저녁의 한 시사 토크 프로그램에서는 행정 조직의 독립화, 격상화도 강조하구요! 향후 전 세계적 예상 경제는 수백조대가 예상된다 하니, 이제 바야흐로 지구촌의 우주 항공시대는 영화에서의 시나리오 정도가 아니라 보다 구체화 현실화 되는 시점에 이른 듯 합니다. 


그런데 요는 모두가 이 분야에 긍정하는 분위기는 아니라 하는 것입니다. 왜 왜 왜 하면서 무관심, 일부러 잊으려 함, 그 돈이면 하면서 당장 주변에 산적한 현실 문제에 주목해 달라는 원성에 가까운 탄식입니다. 참 아쉬운 모습입니다. 

블로거의 입장은, 작금의 가장 보수적인 공동체라 할지라도 지구촌이 하나님의 주신 인류에의 아름다운 선물이라면, 이를 발판 삼은 우주 공간으로의 개척과 개발은 인류의 자정 능력이 살아 있는 한 인간에게 부여 된 자유의지의 신세계를 향한 문명론적 진화요 인류의 보편적 도전 정신의 산물이라는 입장입니다. 

목사가, 강단에 서지 않더니 별소리 다한다 하실 분 계신다면, 이미 십 수년 전 부터 해 온 설교와 세계관 그리고 인류관에 대한 마인드를 유념 해 주실 일입니다. 비록 전문적으로 갖추어 지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

오늘은, 피곤하지만 비교적 개운한 날입니다. 내일은 포근하면서도 오누에는 비가 온다는 예보도 있구요! 


Good night every body~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5&oid=014&aid=0002806216


2013년 1월 29일 화요일

[바울과 그의 편지]를 리뷰하다.

[한국기독공보] 이벤트를 통해 단 하루 만에 공급받은 2008년도 발행본.

바울 연구의 역사를 약사 형식으로 기술한 내용과 바울에 관한 일반 연구(바울의 세계), 사도로서의 바울에 관한 신학적 이해와 연구 및 바울이 저술한 서신서들의 대략 등 4가지 세션 형식으로 구성된 본 서는 [바울과 그의 편지]라는 제하에 단행본으로 목회 현장에 있는 김진욱에 의해 저술 되었다.

 [바울과 그의 편지]를 이해하는 핵심은 부엇보다도 그의 복음에 대한 이해와 그(복음) 내용이라 할 것인데, 마침 저자는 "바울 복음의 내용"이라는 테마로 비교적 일목요연히 잘 정리 해 주었다.

1) 기독론을 중심으로 하였다.
2) 예수 사건은 구원 사건이었다.
3) 바울의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자이신 메시야,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 한 사건에 대한 기록이었다.
4) 바울의 복음관은 하나님의 복음, 선지자를 통한 약속, 하나님의 아들에 이었다.
5) 메시야 칭호는 다윗의 씨 다윗의 아들, 다윗의 가지, 하나님의 아들 등으로 묘사 되었다.

기독 사상이나 기독 정신은 차치하고라도, 주관적으로 예수를 만나는 계시적 만남과 그 예수를 객관적으로 만났던 베드로 및 사도즐의 전승을 따라 예수 이해를 하였고 그 예수를 증거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배경들을 분토같이 여겼던 바울과 그의 편지 한 번 깊이 묵상하지 않은체, 창조와 종말이라는 이 영원 전 부터 영원까지의 eternal Life를 다루는 교회 공동체를 폄하하는 일이 이 땅 한반도에서 잔존함은 스스로를 역사적 오류와 객관적 오해를 범하겠다 함 에 다름 없다 할 것이다! 

이해 없는 오해란 얼마나 처량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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