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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5일 화요일

크리스챤 파워특강 장경동목사 (2012 09월)

크리스챤 파워특강 장경동목사 (2012 09월)


유튜브에 상영 중인 마산 지역 연합 성회 설교 영상입니다. 

믿는 자는 더욱 성령충만 할 일이요,
믿음을 구하는 자 또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진실]1부

http://www.youtube.com/watch?v=8jcffNA2T7I&list=PLMnisdsrvib5M8NTYvIiD1jz5yJJhBmSL

[진실]2부

http://www.youtube.com/watch?v=uwVH6iwF_8c

2013년 10월 21일 월요일

You were born to be loved "당신은 사랑 받기위해 태어난 사람" Saxophone (Alto)강광수

귀하께서 [한우리선교교회]로 나아 오시면,
"절망 그러나 희망!"을 모토로 내달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와 함께 하실 수 있답니다~ ^^

2013년 10월 3일 목요일

대한항공 서비스 캠페인 "젊음" 편(+재생목록)

이 땅의 모든 젊은이들과 더불어 공유합니다. 
이륙 직전의 에너지는 최대한의 출력이 필요하지요만,
그 굉음과 통증에 가까운 동체의 떨림 후 부드러운 상승이 있음을...... ^^

2013년 9월 9일 월요일

[C채널] 땅끝까지2 13회 - 부안 식도 드림몸찬양선교단






아름다운 '변화'와 '감동'의 역사가 더 많은 분들에게 복된 역사로 충만하옵시길 희구합니다

2013년 8월 30일 금요일

언어의 조련사 대통령이 함께 한 50년 전 사람의 現顯!

고 마틴 루터 킹 목사를 기념하는 미국의 이모 저모를  백악관에서 공유 하여 주셨습니다. 50년 전이나 50년 후의 미국은 지구촌 그 곳에 여전히 자리 하거니와, 그 시절 그 사람들은 이제 50년 후의 사람들로 성장하였고, 그 시절을 모르는 새 시대 새 사람들은 오늘에 이르러 새로운 환경과 시스템 속에서 현존하지요.

우리 대한민국도 50년 전이면 전 후 극복을 위한 불타는 수고와 헌신으로 그 시대 그 사람들은 이제 오늘의 '누려도 좋을 분들'이 되어 우리 곁에 있지만, 우리의 오늘은 그리 녹록치 아니 하니 유감 아닌 유감에 마음 무겁습니다. 

항상 밝에 웃으며 자신감 넘치는 언어의 조련사라는 호평을 듣고 있는 +Barack Obama 대통령께 보여 주고 계신 장면들을 '함께' 해 보시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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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18일 일요일

한 해의 여름철 농사 후반 풍경

매 해 농번기는 농한기를 통해 재충전 된 넝군들의 기지개 철입니다. 겨우내 얼었던 대지를 녹이는 햇살과 더불어 병충해의 완결을 위해 소각 작업을 시작으로 밭갈기와 고르기, 논이랑 만들기, 볍씨 고르기와 촉 틔우기, 씨뿌리디와 모종 가꾸기 그리고 이윽고 모내기와 모종 심기 등이 끄타면 잠시 한 숨을 고르지요.

그것도 잠시, 잡초 뽑기, 피살이, 농약에 거름주기, 북돋우기, 지지대 박아주기, 떡잎 잘라주기, 믈대주고 빼주기, 비료주기......

이 정도 되면 뜨거운 여름에 장마, 태풍기가 되어 드디어 봄철 채소는 마무리가 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김장 배추와 무우 심기 및 재배 및 출하와 겨울 준비로 이어 지는 농사 풍경은 지금 본 포스팅이 쓰여지는 시기가 태풍기를 목전에 두고 있는 가을 김장배추와 무우를 준비하는 시점이란 점.

여름 내 녹빛을 뽐내던 고추와 토마토, 깻잎, 오이, 가지, 호박 넝쿨을 약 2시간 여에 걸쳐 휘둘러 보니 언제 그런 충경이 있었느냐는 듯 마당은 훤하다 못해 황당한 모습입니다. 거기에 가축분뇨가 연상되는 벗섯재배용 찌끼들을 흩뿌리고 나니 영판 새로운 모습입니다.

블로거가 아는 한 해 농사 풍경은,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인생의 순환 구조와는 또 다른 "인생에의 중량감"을 느끼게 해 줍니다.

무더운 가을 매미 소리 요란한 이 월요일 오전의 그림을 나누며.

여름 채소는 아웃, 
가을 배추 심기 전 퇴비(버섯찌끼) 뿌리다.

배추는 모종 심고
무우는 씨 뿌리고
골파는 묻다.

배추 모종, 지근거리에서.

어느새 자란 채소들~ ^^

2013년 7월 8일 월요일

모바일 전송 가능케 된 I like you

이젠 모바일로도 구플 블로거 I like you가 포스팅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블로거 입장에선 다만 감사할 뿐이며 모든 기술진들께 감사의 인사 드립니다.

본 I like you의 의미와 사유체계에 대해서는 상단 소개글을 넉넉히 헤아려 주시기 바라며, 블로거 접속시 아낌 없이 소감 남기시어 또 다른 블로거들과의 아름다운 소통들 있으시기 원합니다.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평강을 축복합니다(신약성서 요한복음 14:27).

2013년 7월 1일 월요일

President Obama Speaks at the University of Cape Town

자연스레 청중의 박수를 받는 그 스피치를 들을 듯 말 듯 합니다. 
들리는 듯 들을 수 없는 한계! 

본 블로그를 방문하시는 분들은 그 묘미를 충분히 맛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영원할 것입니다~

한누리성결교회(담임 최하용 목사)에서 최 목사님을 비롯한 샤론 중창단의 내방이 있었답니다. 최소한의 청중들 앞에서 연주한 곡이지만, 이렇다 할만한 무대 시설은 아니었지만, 무더운 날 더위를 덥다 하지 않고 달려와 오후를 함께 해 주신 고마운 분들!


그 찬양의 내용처럼 영원한 사랑을 의지하고 믿기에 오늘의 하수상함도 문제가 되지 않는 듯 합니다. 새로이 의지를 갖고 출발하신 Pastor 강광수.  그 분을 응원하실 분들이 더 많아지고, 그를 통해 증거 될 메세지들을 통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일들이 더 많아지기 원합니다! 

2013년 6월 5일 수요일

雜草를 제거하는 農夫心情 헤아리기와 農事 有感!

구플러는 도시 출생입니다. 도시 출생이나 농촌 출생이 무슨 큰 구별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최근 들어 농촌 출생아의 수효가 극히 줄어 들어 현재 머물고 있는 농촌에서도 유아 보기가 매우 드문 가운데 도시 출생으로서 농부의 심정을 헤아리게 된 철든 구플러 자신이 고마와 도시나 농촌이 진심으로 어울리는 우리 사회, 우리 시대이기를 소망하는 심정을 피력해 봄입니다. 최근에는 도시에서도 농사에 해당하는 채소가꾸기, 텃밭가꾸기 등으로 녹색공간 창출에 많이들 신경 쓰는 분위기인데, 이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 보며, 서울의 어느 텃밭 공간을 주차장으로 만들어 거기서 발생하는 수입에 웃게 만들었다는 기사를 보았을 때의 씁쓸한 심정은 그 사실 자체에서 주지 못하는 情的 生活觀과의 괴리감에서 오는 아쉬움이려니 합니다. 

경기도 이천에서 임신이 되어 부산에서 출생, 그 곳에서 청소년기까지 성장한 구플러는, 청년기를 부천에서지내던 중 강원도 어느 곳에서 국방의 임무를 완수 후, 경남 김해에서 잠시, 그리고 다시 서울과 부천에서 생활하던 중 충북 옥천 청산에서의 3년여를 지내며 농사의 기본을 맛보았어요. 다시 청주와 경기도 여주를 거치면서는 농사와는 거리가 있었지요. 

지금은 충남의 거처에서 생활하며 마당의 텃밭을 수년간 가꾸어 보지만, 이것을 농사라 하거나 구플러를 농부라고는 하지 않는 듯 합니다. 농협에서도 전문 농군이 아니면 기본적으로 주던 농자재 할인 혜택 등도 이제는 원천적으로 제한 하는지, 올해는 이것 저것 농사에 필요한 물품 구입에도 적지 않은 당황스러움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 이었지요. 농촌지역에 거주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국가가 혜택을 주던 시절을 이제는 문닫는 정책이 생긴 것인지,  수만 인구가 농촌으로 다시 유입된다 하여 지레 겁먹은 농촌지역의 텃새부리기가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나, 가히 좋은 모양새는 아닌 것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주변에 누군가가 사용하던 조그마한 텃밭을 아무 조건 없이 그냥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큰 기술이 없으니 주저하던 끝에 나무 너댓 그루를 식목했지요. 그것도 주변 형제들의 의견을 물어서! 그래도 다소 허전한 생각에 몇 몇 채소들을 갖다 재배 해 보려고 포기로 심어 수시로 돌아 보는 중입니다. 

농사의 절반이 플 뽑는 일이라는 이야기를 청산에서 젊은 시절 농부들과 어울리며 들었던 적이 있었고, 그 이야기의 이론적 동의로 고개를 끄덕인 경험도 분명히 있지요만, 금번 다시 한 번 잡초 제거시 가지는 남다른 생생한 교육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이 있습니다. 누가 가르쳐서 얻는 교육은 아니지만, 스스로 느껴지는 이 생생한 자연으로부터의 교육은, 과연 자연교육의 가치를 체득하게 되는 싱싱하고도 생생한 교육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선 고추와 토마토를 심은 주변의 잡초입니다. 

예서 자라는 잡초들은 아무래도 신경을 많이 써서 크게 자라거나 많이 자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뽑고 돌아 서면 다시 난다"는 농부들 이야기대로 분명 잡초 제거를 하고 난 수일이 지나면 어김 없이 새로운 풀들이 돋아 이내 정리를 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분명 주작물인 고추나 토마토의 결실이 빈약해지겠죠?

다음은 나무 주변 잡초들입니다. 

사실 나무는 채소 종류와는 다르므로 잡초들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줄 압니다. 그 근본이 다르기에 나무의 성장에 잡초는 그리 문제가 안된다고 보았죠. 그러나 사실 그것이 아닌 듯 합니다. 나무를 심었기에 풀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한마디로 '엉터리'거나 '모르는 소리' 혹은 '무책임한 이야기'라 단언하게 됩니다. 이유는, 이제 막 심은 나무는 그 성장에 있어 어느 정도 착지와 주변 잡초들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정도의 깊은 뿌리 내림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나무라 하여도, 아직 심은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나무가 영양소를 공급 받는 과정에서의 방해가 되는 잡초들의 무성함은 필경 그 생장에 큰 지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채소나 나무의 성장에 직접적 영향을 주는 영양소적 문제는 아닐지라도 환경적인 면에서의 악영향으로써의 잡초라는 존재입니다. 

나무든 채소든 잡초들이 무성하다보니, 가장 큰 문제는 '소통'이라는 것입니다. 이 소통은 바람의 소통을 주로 의미합니다. 

우거진 잡초의 경우 크게는 원 채소나 나무의 키보다도 훨씬 크게 자라, 심지어는 채소가 잡초처럼 보이거나 잡초에 둘러 싸여 초라하기까지 보이는 어린 나무의 모습은, 이 잡초가 환경적인 면에서 얼마나 악영향을 주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바람이 소통되지 않으니 신선한 공기를 섭취하여야 할 채소나 나무는 숨막혀 질식하는 생물이 되어 웅크린채 자라지 못하는 소외된 사람들에 비할 바인 것을 구플러는 이내 보게 됩니다......

물, 공기, 바람이 주는 식물 성장에의 기본 요소 가운데 바람을 차단하여 신선한 공기 공급을 방해하는 잡초들의 우람한 성장!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인생이 그러하다는 것을 구플러는 생생히 체험합니다. 

그 밖에 써야 할 이야기와 쓸 내용이 태산이나 일일이 표현하고 써 가기에는 '오늘'과 이 '아침'이 너무도 아쉽습니다. 그저 가슴에 담아두고 기회 되는대로 메세지의 소스 삼아야겠습니다. 

부지런한 농부는 잡초를 적기에 잘 제거하고 나아가 식물 성장에 늘 '돌아봄'이 있음을 깨닫게 됨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들 가운데 또 하나의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신의 복된 일상을 축복하며!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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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13일 월요일

I like you: [Pg.3] Free Memo in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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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쬘 (포), 모진 마음 (금) 曝+(금)인데 '금'字는 지원이 안되고 있군요. 广와 歆가 합해진 字입니다. "포금" ^^

"모진 마음에 볕을 쬐는 사람(삶)으로 살아 가자" 하는 듯으로 고교시절 한참 옥편을 뒤적이며 공부할 때 구성 해 보았던 我呼인 셈입니다. 그런데 내자의 지적에 의하면 그러니 당신의 삶이 고단하다는겝니다! ^^;

그래서 새로 사용하는 이름 박사랑!

이젠 타자를 따뜻하게만 하기 이전에 나 자신을 따스하게 함이 귀하다 여기고 합리적 이고이스트(rational egoist)가 아닌 낭만적 이고이스트(Romantic Egoist)로 살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뒤늦게서 사랑을 조금식 깨달아 가는 '철부지 벗어나기'인가 합니다. ^^

긍정의 공감으로써의 Like 주시면 용기가 날 듯 합니다! 

이 포스팅은 아래 주소에서 보시듯 방석운 목사님의 질문에의 응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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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488439617894076&set=a.111791852225523.16059.100001841278334&type=1&theater&notif_t=photo_comment  

2013년 5월 9일 목요일

잘 되면 한 없이 잘 될 수 있는 나라! 못 되면 한 없이 못 될 수 있는 나라!


잘 되면 한 없이 잘 될 수 있는 나라! 
못 되면 한 없이 못 될 수 있는 나라! 

어느 나라고 그런 일들은 있어 왔고 있겠으나, 작금 우리 나라를 돌아 보는 앞선 지식인의 시각이 예사롭지 않다. 누가 있어 나라 망하는 것을 좋아 할 사람 있을까마는, 나라 망하게 하는 것들의 흉용은 싫어도 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역사의 순리였다.  

여성으로서 한 나라의 운명을 책임 지고 "나라와 결혼하였음"을 선포한 지도자의 남 몰래 흘리는 눈물과 애절함이 있어도, 여전히 근절되지 못하는 각종 범죄 소식들은 인권이라는 미명으로 포장된 채 강력히 징벌 되지 못하는 예도 있으니 필경 이는 부정의 연루됨이 있으리라!  

나라 없는 개인이 상상 안되어 나라 잃고서야  통탄하기 전에 작은 나라라도 세계를 가슴에 품고 뛰고 있는 이 나라의 근본 착한 심성이 희석되고 왜곡되는 일 없기를 바랄 뿐이다! 

김진홍 목사께서는 독일 유학파 지식인으로서 그의 목회적 명성은 자자하여 마치 전설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한 그가 이제는 원로 목사가 되시어 간헐적으로 메세징 하시는 이야기를 후대 교회공동체는 유의하여 마음에 새길 일이다. 그의 글 가운데 미가는 눈으로 보았다. 그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죄를 4가지로 선포하였다.


첫째가 가난한 사람들을 학대하고 착취하는 행위이다. 
둘째가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들과 상류층의 부패와 뇌물이다. 
셋째가 거짓된 언론이다. 바로 거짓 예언자들의 거짓된 메세지다. 
넷째가 헛된 것을 섬기는 우상숭배이다.


선지자 미가는 당대의 동료 예언자들의 메세지를 하나로 요약하여 다음같이 선포하였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서 6장 8절) 

이상의 글은 http://blog.naver.com/gjhp3/140188833726 에서 전문을 스크랩한 글로 포스팅 되었으니. 한 번 둘러 보시면 좋을 것이다.  

전언한대로, 여성의 사회 진출 상승론으로 보아 반가울 수 있으나, 그만큼 힘겨거나 예상 못할 일들로 넘치는 사회상, 유약해 져 버린 일상은 아닌지, 사회적 부정과 퇴폐함은 없는지 모두의 근신이 절대 요구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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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8일 수요일

일자 등은 자동 정렬 될테고!

I like you: [Pg.1]Diary in Community: [Pg.1]Diary in Community   (fb, G+, Blog, etc......) ------------------------------------------------------------- 와우~ 드디어 페이지의 성격을 알 듯 하다...

현각 20130509 08:05를 지난다.
가정의 달이 시작 되어 어린이 날, 어버이 날을 지나는 중.
수일 후면 스승의 날이 올테고,
그 다음엔 부부의 날도 있다니 가히 가정의 귀함을 생각 하는 우리 사회가 정겹다.
그런데 어찌 가정 붕괴율은 높은 것인가?

또 한 번 [Pg.1]Diary in Community 기능 이해에 대한 도전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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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like you: [Pg.3] Free Memo in G+: [Pg.3] Free Memo in Google+ --------------------------------------------------------------------- 본 페이지는   [Pg.3] Free Memo in Google+  제...

이 아침 다시 써 보는 프리 메모!
어떻게 읽혀 지는지 다시 도전~

흉중흠대를 논하라!


胸中欠大라 쓰는 것이 맞는지 정확히는 모르나, 가슴에 품고 있는 생각의 작음을 이르는 표현이라 한다.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소인배 같은 생각! 

그것이 문제라는 점을 숙고한다. 성결이라는 것이 자칫 흉중흠대 하여 속좁은 신앙관으로 飛上함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아니 될 일이다!

return response가 없다

지금 본 구글+ Blogger를 통해 소통되는 정도와 참여도가 어느 정도 되는지 블로거로서는 알 수가 없다. 여러가지 알림으로 그런가보다 하고 알 수 있는 내용도 있으나, 그런 것 말고 사실상의 소통 정도와 반응 정도에 대한 return response가 없다는 얘기!

이을 어찌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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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도 어버이 날!
하루종일 고추이식.

오전 중 노인 어르신 한 분이 방문하시어 물주기를 하시는데, 별 것 아닌 듯 하지만 여간 아니었다. 특별히 경운기로 공급하는 물주기는 라인(호수)을 끄는 일만 하여도 젊은이들조차 힘겨운 일을.....

언젠가 '기업인천하지대본'이라는 글을 대로변에 현수막 처리하였기로 매우 불쾌히 여기며 글 올렸더니 어느샌가 내용물이 사라져, 한 편 미안하기도 하고 한 편 고맙기도 하였던 생각이 났다. 

"農者天下之大本也"

뉘라서 이견을 달 것인가?
알지 못하면 긍정 할 수 없을 것이다.

한가지 폐단은, 부친 상을 당한 후 아직 1년도 되지 않았거늘, 모친께서 여전히 같은 주소지에 거하시면서 농사를 짓는데 어찌 농협에서는 농민에게 제공하는 혜택들이 불가 하다며 조합원 가입과 소요 경비를 요구한다는 말인가? 자동승계 등 경제적인 문제나 행정적인 문제 이전에 현장에서의 실사를 통한 농민 예우와 보조를 해 줌이 마땅한 일이겠거늘 어찌.....

이를 어느 부서에 고하여 시정 요청을 해야하는지, 요청 가치가 있는지도 고민하게 된 하루이다. 이런 식의 농협 운영은, 예의 농협 개설의 취지에 분명 반하는 바가 될 것이다. 

농협의 잡음이 심하더니, 그 하위 현장은 더함을 애석히 여기지만, 시대의 흐름이 너무 거센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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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free memo중이다. 본 메모를 남기면, 그 다음 노출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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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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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3일 금요일

I like you: SDF 참관기

I like you: SDF 참관기

SDF 참관기

SDF 2013이 5.2-3일 양일간 신도림 모처에서 있었습니다. 블로거는 2일 오전부터 조금 전 폐회시 까지, 15:10-17:40까지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전 과정을 생방송으로 시청 할 수 있었습니다. 디지털 서울 포럼 2013!

SBS 방송과 Naver의 협력으로 진행된 귀한 포럼에 함게 하게 된 기쁨이 남다릅니다. 사실상 툭 털어 놓고 이야기 하자면, 최근 일반에 회자 되고 있는 내용들의 집대성에다가 해당 유관련자들의 적절한 홍보도 가미 된, 매우 합리적이고도 고도의 공유 협력 프로그램으로써의 열정이 엿보이는 프로그램임에 틀림 없습니다. 모든 출연자 및 강연자 제위와 유관 스탶 제위께 다시 한 번 더 사례 하는 심정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온라인상에서의 매우 아쉽고 부끄러운 모습을 보았기로 이 곳에 기하여 향후 이러한 수치를 면하게 되기를 바라는 심정을 담아 봅니다. 

이번 방송은 영어 강연자 위주의 강연이었고, 동시 통역을 통해 우리 한국어 강연자의 경우에도 영어로 동시 통역하는, 영-한, 한-영 동시 통역 서비스가 돋보인 매우 잘 준비된 행사였습니다. 사실상 언어가 극복되어 전혀 강연 참석에 문제가 없었던 귀한 포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온라인상에서는 무책임하고도 무분별하게 육두문자를 포함하여 저속한 무책임적 비판들이, 그것도 언어 통역 자체와 통역자에의 인신 공격성 댓글들이 난무했다는 점입니다. 

마지막 폐회시가지의 온라인 참석자의 수효는 1000대를 상화 하였기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이들 외에 모니터 하시는 분들을 포함하면 더 많은 분들이 금번 포럼을 시청 하셨을 터인데, 만일 외국인들 가운데 이러한 불편 불만의 무례한 댓글을 보신 분들이 계셨다면, 우리의 무례한 커뮤니티 모습에 무어라 하였을지 참 난감한 심정이었습니다. 

금번 포럼은, 이미 앞서 가는 혹은 모델이 될만한 기업이나 리더적이 ㄴ인사들을 청하여 짧은 시간 안에 FED 형식으로 free talking하는 형식이었습니다. 저들 가운데는 우리의 참여도나 호응도 등을 보고 우리 기업과 우리 나라 투자처에 투자를 고려하실만한 분들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고, 블로거 자신도 강연 도중 댓글을 통하여 투자 요청도 언급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눈에 띄는 부정적 댓글들은 참 유감이 아닐 수 없었으며, 언젠가는 다 드러날 개인의 인격이란 점을 왜 모르는지에 대해서도 참 아쉬운 모습이었습니다. 

세미나, 컨퍼런스, 포럼 등 유수한 인사들의 지식을 나누는 나눔의 장에는 그만큼 학문 혹은 전문성, 기술, 관심도 높은 분들이 출입하는 공유의 현장이며 공공의 공간입니다. 비록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공 공간에서 특히 보이지 않는 온라인상에서의 반응는 그대로 우리 커뮤니티 문화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첩경일 터, 이에 대한 각 커뮤니터들의 절제돈 행동 양식 및 언어 표현을 참 아쉬워 하는 마음, 결코 감 출 수 없었습니다. 좀 더 나은 관람 문화를 기대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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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eouldigitalforum.org/kr/




2013년 4월 27일 토요일

비 소식도 예보된 4월의 마지막 토요일 저녁 시간대로 접어 드는군요!

우선 아래의 이미지를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상의 비행체들은 기체명과 비행시기가 순서대로 다음과 같이 정리 되며, 본 이미지는 NASA에서 발췌하였습니다. 공공연한 사이트 공개물이기에 저작권법 문제는 없을 줄로 알며, 이의 문제 발생시 본 포스팅은 삭제를 하게 될 것입니다. 본 포스팅이 보안, 군사, 안보 등의 문제에 위반 없이 우리 일반에도 공개된 자료이니만큼 자유로운 열람 가능할 줄로 알고  소개합니다. 

 < 다 음 >
001 X-1 벨로켓 비행기 1947
002 더글러스 D-558-II 1949
003 벨 X-2 Starbuster 1952
004  X-15 1959
005 XB-70 1964
006 록히드 YF-12 1965
007 NASA F-16XL-2 1965
008 수정 FA-18A 1999
009 NASA's X-43A 2004
010 NASA F-15B 항공 연구 테스트 베드 1993
011 '조용한'F-1B 2006
012 NASA의 FA-18B -ing

목사인 블로거가 이런 비행체에 대한 관심 포스팅을 하는 것은, 이미 미국 대학생들에 의해 개발 되어 날고 있을 날으는 자동차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며, 우리 공군력과 세계 각 국의 공군력이 지니는 위력 그리고 항공, 우주 분야에 대한 평소의 관심사에의 일종이니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블로거들은 없으시기 바랍니다. 

이미지와 간단 소개에서 보시듯, 작금 미국의 공군력은 일반의 상상을 초월하며, 이 모든 비행체들은 그대로 우주 항공개발에도 적용 되어 인류 전체를 위한 우주 개발에도 구체적으로 적용 되고 있는 줄 압니다. 이미 우주 쓰레기 문제가 엄청난 문제거리가 된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 하고 계속적으로 개발 중인 우주개발사에 대한 관심을 조금만 기울이신다면, 작금 우리 지구촌의 몸살 정도가 어느 정도이며, 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가에 대한 자기 정체성 또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될 줄로 압니다. 

이러한 때에 맞이하는 2013년도 4월 마지막 주일을 준비하는 오늘 4월 27일 오후는, 개성공단 파견 근무자들의 복귀 소식과 함께 씁쓸하게 막을 내리며 조용한 가운데 국제 사회와 세계 경제에 적지 않은 타격도 가져 오고 있다 하니, 우리 커뮤니터들은 이 시대적 난관이 속히 안정을 되찾을 수 있도록 응원 많이 하셔야 할 듯 합니다. 극단의 종국은 결국 양자의 파국이나 커다란 손실이 자명하거늘, 서로의 버티기와 한 번 해보자 식의 경쟁은 향후 어떤 민족적 손실을 가져 올 것인지 참 심려스럽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이런 범 민족적, 범 세계적 스트레스에도 불구하고 지존이니 엄존이니를 찾으며 정치, 군사력 강화와 그것만으로 문제가 완결 될 줄 알고 井低之蛙격 국가 운영을 해 가려는 6.26 세대의 老狐化와 젊은 지도자에의 愚昧政治化의 道는 금번 개성공단 폐쇄 조치의 현실화로 그 내면이 드러난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매우 애석한 일이며, 이제라도 진지하게 현실을 인식하며 좀 더 현명한 대화와 부드러운 합의로 나아가 민족사적 단절의 골이 더 깊어 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설상가상 백두산의 마그마라도 격노의 불을 뿜을라치면, 그 엄청나고도 상상 불가한 어려움을 어찌 홀로 감당할 것인지, 도대체 전 국민을 戰鬪的 百姓化함이 가한 일인지를 신중히 판단 해 볼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키부츠와 모샤브 그리고 전 국민의 군사적 의식 강화가 오늘의 북한이 갖는 그것과의 근본적인 차이는 또 어디에 기인한 것인지, 그 근본적인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솔직하게 역사 앞에서 물어야 할 일입니다. 

[I like you] 블로거는 분명 "Love one another"의 계명을 중시하는 의지의 표현으로 구축된 마인드가 분명하지만, 이 사랑의 개념은 신적 아가페를 희롱하며 무조건적 다고 다고식의 오해된 사랑을 포함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아가페적 사랑은, 그 내면에 공의가 포함된 사랑이라는 점을 어릴 때는 몰라도 장성하여서는 체득함이 순리이기 때문이죠.

아주 오래 전 夢中에 온 하늘을 뒤덮고 어디론가 비행하던 비행선단의 비행 모습이 현실에서 보이는 최악의 경우가 우리 한반도에서 펼쳐지지 않기를 애절히 간구할 뿐입니다! 

5월 6-8일에는 중요한 훈련이 전국적으로 펼쳐진다고 하는 소식들이 여기 저기서 전달 되어 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무 생각 없이 범죄행각을 벌이는 자들도 있다니, 분명 우리 살아 가는 세상은 요지경 세상이란 어느 가사 글이 사실에 다름 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합니다. 

비 소식도 예보된 4월의 마지막 토요일 저녁 시간대로 접어 드는군요!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은총 중에 거하시기를 희구합니다! 


20130427 17:06.



2013년 3월 14일 목요일

fb와 구플이 한걸음 더 나아 간다~

fb와 구플(Google+)이 서비스업을 하고 있군요! 
fb 타임라인의 경우는 순차적으로 변경 중이라고 하고
구플은 어느샌가 이미 약산의 변경이 보이는군요. 
사용자는 다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해당 SNS의 내용들은 어디론가 공유 되고 있겠죠?

이제는 SNS를 사용하면서 모든 사용자들과 하나가 되어 가는 시대!

모두의 선한 사용을 기대하며 긍정적으로 나아갈 일입니다!

님이 본 [I like you]를 방문하셨다면, 
https://www.facebook.com/seongsoo.park 를 찾아 안부 해 주셔도 좋습니다! ^^

2013년 3월 4일 월요일

경칩에 기억 난 6월의 개구리 이야기!

여기 저기서 경칩 소식과 함께 개구리 이미지들이 업로드 되고 있군요! 다소 계절적으론 다르지만, 6월의 어느 개구리 관련 블로깅 하였던 블로그 포스트 생각이 나기로 한 번 공유 해 봅니다! 

개구리도, 사람이 가까와 지면 다가 오는 情이 있나 싶을 정도로 신기했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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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gjhp3/140070827346


20130303 “하나님의 受洗” (눅3:21-38)


20130303 “하나님의 受洗” (눅3:21-38) 315/313장


누가는 상당한 학문적 수업을 쌓은 지성인으로, 직업은 ‘의사’였습니다. 당시의 학문 중심지였던 다소(Tarsus)에서 의술을 습득한 것으로 보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기록은 목격자들의 증언 자료에 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누가에 대해 ‘사랑받는 의원(골4:14)’으로,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사람(딤후4:11)‘으로 소개하였습니다. 

그가 기록한 또 하나의 사도행전을 통해 많은 성서신학자들은 누가가 ‘성령의 사역’과 ‘기도’에 대해 강조하였고 ‘여인에 대한 관심’을 부각시켰으며 ‘부활 후에 현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 하였음을 언급합니다. 나아가 ‘이방인에 대한 복음 전파와’와 ‘재산(富)에 대한 적절한 관리’가 강조 되어 ‘교회 공동체의 방향’을 잘 이끌어 주었음에 주목합니다.

특별히 누가복음은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인성과 감정 그리고 그 분의 기적, 비유, 교훈 등의 모든 행적에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인간미가 人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또한 거기에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능력과 의지가 잘 조화 되어 나타나고 있지요.

누가복음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뉘어 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선은 눅1:2-4:13에서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개’를 보게 되며,
눅4:14-9:50에서는 ‘인자의 갈릴리 사역’ 그리고
눅9:51-19:27에서는 ‘인자의 배척 당하심’과
눅19:28-24:53에서는 ‘인자의 죽음과 부활’등에 관해 잘 묘사 되어 있습니다.

말씀 각 부분 부분을 읽노라면,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인간과 함께 하셨고 어떤 환경에서 어떤 일들을 당하시고 어떤 대미를 장식하셨는지를 통해 ‘새로운 기다림’을 이 2013년에도 지속할 당위를 찾게 됩니다. 눅24:51-53을 읽어 보시면, 당시 예수그리스도를 경험하였던 그 목격자들의 증언에 근거한 예수 신앙 (기독 신앙)이 오늘 우리의 ‘의미’의 근거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인간이 되셔서 인간계에 오신 ‘하나님의 사역과 의미’를 인간의 지성과 체험 능력 안에서 경험할 guide book으로써 누가 복음을 대하는 것이며 이 지침이 되는 누가복음을 읽으면서 체험하게 되는 하나님의 touch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초월적 역사’ 의 運動인 셈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수세의 본을 보여주신 예수그리스도의 수세는 곧 하나님의 수세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람 touch를 초월한 인간의 하나님 touch를 읽고 보게 되는 셈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구원의 시초가 될 하나님의 방법 제시로써의 세례에 관한 문제를 통해 하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셨다는 논리와 하나님도 받으신 세례를 인간이 거부할 이유 없음에 대해 明示的으로 깨닫게 되는 빙거憑據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 하나는 아직 세례를 받지 못했거나 세례를 받지 않은 자 에 대한 입장이며 또 하나는 이미 세례를 받았거나 받은자(들)에 대한 것입니다.

우선 ‘아직’ 수세하지 못했거나 않은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두 가지의 경우입니다. 아직 믿음이 없어(not believe but faith) 수세를 망성이거나 거부하는 경우예요 전자는 믿음을 구하거나 갖게 되면 매우 순응적이고도 감격적으로 능동적인 수세의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희망이 보이는 모습이죠 허나 후자는 믿음을 가지려 하지도 믿음을 가지고자 하는 자를 향해서도 매우 배타적이고 적대적 자세를 취하곤 합니다. 이 의식 행위를 무시하거나 이상히 여기거나 배척하기도 하지요 절망적입니다.

전자가 희망적임은 기도를 통해, 성경 연구와 지속적인 예배를 통한 말씀으로 부터의 깨달음이 있다면 매우 순적하게 수세에 임할 자요 그리스도인으로써 온전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선 수세자는 저들을 위도하며 믿음 안에서 리드해 주는 친절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고백에 간증이 없거나 형식과 외식에 대한 가치 認知 하에 구원의 확신 없이 수세 할 겨우도 있으므로 스스로의 良心에 따라야 할 것이며 거짓된 수세는 무효 할 것입니다.

절망적인 후자의 경우는 사실 대책이 없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성령의 도우심과 스스로의 선택에 의할 수 밖에 없으므로 인간이 touch 할 수 없는 道 外的인 상황입니다. 그 어떤 성직 수행자도 따를 수 없어요. 불행한 경우이며 매우 안타까운 경우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들은 교만, 권위의식, 불필요한 명예의식, 대중을 의식하는 허영심, 말씀에 대한 배척심, 교회공동체를 향한 적대심, 부족함 없는 생활 환경, 수세 자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타종교와의 갈등에 대한 우려 ‘의미’를 두지 않음, 불확신 하나님 존재에 대한 인정을 하지만 긍정 수용은 하려 하지 않음 등입니다.

전자든 후자든 기억할 것은, 세례를 받기 전 ‘완벽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를 완벽한 믿음으로 규정할 것인가도 애매모호 하지만, 완벽한 믿음의 주체는 ‘나’ 이전에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이미 주신 믿음에의 반응으로 나아감이 세례의 실체임을 기억한다면, 세례의 핵심은 마음으로 믿는 바를 입으로 시인함의 행위적 묘식 행위이자 거룩한 교회공동체 앞에서의 신성한 예식이 비로소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세례’라는 형식과 그 세례를 통해 ‘성령과의 하나 됨’이라는 본질적인 내용이 사실은 세례를 통해 새 생명이 회복되는 가치를 가치 되게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세례를 받지 못한체 주저하고 망설이는 약한 믿음의 소유자는 속히 이 거룩한 예식의 가치를 위해 기도하며 수세에 임할 일이요 여전히 세례의 가치를 업수히 여기거나 훼방하려 하는 분이 있다면, 하나님의 엄존하심 앞에서 자기존재 이유와 생의 유한함을 성찰하실 일입니다.

다음으로 이미 수세자가 되신 분(들)의 경우입니다.

信者가 聖徒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존귀하고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이는 마치 애굽에서의 노예생활 중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입성한 선민이 됨과 같은 논리이니, 세상 그 어떤 물질적 요건으로나 이론적 지식적 사고로도 계산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변화의 통로가 되는 것이 세례 사건이거니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확신으로 세례 받은 성도과 구원함을 받은 성도로 이 세상을 순례함은 주지하는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세례 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광야 같은 세상에서 만나는 신앙의 저해 요인은 결코 만만한 것들이 아닙니다. 따라서 믿음생활 중에도 간혹 세례 당시의 신성함과 거룩함을 잊는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첫사랑의 순수와 감성을 망각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미 세례 받은 성도는 스스로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깨어 경성하며 성도의 마땅한 바 성결의 삶을 정진하므로써 성화의 자리에 이르도록 완주해야 할 것입니다.

앞선 수세 성도로써 나중 된 신앙의 후배를 향해 신앙의 모범과 건덕생활을 경주할 것이요 나아가 세례의 가치와 의미를 권하여 또 다른 수세 성도를 양산함에 힘 쓸 일입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니, 성령의 사람은 마땅히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사랑의 사람인가? 나는 희락의 사람이며 화평의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오래 참으며 자비롭고 양선함으로 덕을 베푸는가? 나는 충성스런 성도의 삶을 경주중이며 온유하고 겸손한지 나아가 절제의 삶을 충만히 살고 있는지 항상 스스로를 살필 일이며 우리의 심판장 되시는 주 예수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이를 때 “잘 했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인정받는 선한 열매 의 주인공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春3월 봄 계절에 맞는 이 생명의 계절에, 세례 받은 성도로서의 복된 자기 성찰이 충만하시기를 애심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당시 시대를 생각해 보십시오. 눅1:1-2을 보시면 시대적으로 참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color로 그려본다면 매우 어두운 시절이요, 日氣로 대비해 본다면 무척 흐리고 답답한 시대였던 상황입니다. 그 힘겹고 지루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통해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게 하셨습니다(눅1:3). 그의 메시지는 매우 단호하고도 단순했으며 청자로 하여금 심령을 움직이게 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눅1:7-14). 그의 선포 앞에서 경청하였던 무리(눅1:7)와 세리들(눅1:12)과 군병들(눅1:14), 그리 숱한 당대 백성들(눅1:15, 21)은 ‘거부할 수 없는 이 회개의 복음 증거’ 앞에서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눅1:21).

바로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 역시 세례를 받으러 요한에게 머리를 숙인 것입니다. 이 상황에 대해 마태는 세례 요한 자신이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하며 말린 모습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기술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3:14-15)” 하심으로서 神이 人間에게 머리 숙여 세례 받으심의 役事를 성취 하셨습니다.

洗禮는, 분명 구원의 예표입니다(벧전3:21).
세례는, 분명 성령과 하나 됨의 증거입니다(고전12:13).
세례는, 진정 그리스도와 합하여 그 그리스도의 옷을 입음입니다(갈3:27).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로 옷 입고 이 땅에 오신 완전하신 인간으로 세례의 현장에 동참 하셨습니다(눅3:21). 하나님께서는, 세례 받는 외적 신앙고백과 표현을 결단하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3:22)” 하는 성령강림을 표적화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 받음=죄 씻음 받음=구원(행22:16)’을 公式化 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는 이렇듯 귀하고 복된 ‘의미’와 ‘가치’와 ‘효험’과 ‘능력’을 동반하며, 하나님께서는 그렇기에 스스로 먼저 인간에게 세례 받으시는 ‘낮아짐’을 통해 ‘영생에 합당한 자’의 ‘세례 받을 당위’를 온 몸으로 力說해 주셨습니다.

3月 ‘고백의 달’에는 성도 여러분 각자의 ‘믿음의 고백’과 受洗의 役事, 세례 받음에의 회고와 상호 권면으로 受洗者와 그 결단이 넘치는, 역동의 계절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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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24일 일요일

김영한 교수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주”(Kyrios) 칭호]


역사적 예수에 대한 “주”(Kyrios) 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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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2.25 09:16   
[김영한 교수] 나사렛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 (54)
본지는 2013년 사순절을 맞아,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잠시 중단됐었던 김영한 박사(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초대 원장)님의 글 ‘나사렛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을 계속 이어서 게재합니다. 이 글은 지난 2008년 SBS가 다큐멘터리 ‘신의 길, 인간의 길’에서 “예수는 신화다”라는 주장을 여과 없이 방영한 데 대해, 김영한 박사님이 정통 기독교 신학에 기초해 반박하고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에 관하여 역사적인 자료에 기반된 증거를 제시하고자 작성한 것입니다. -편집자 주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머리말

“퀴리오스”(Kyrios, 주, 主)라는 용어는 신약시대에 유명한 인물에게 존경을 나타내는 칭호로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헬라 이방세계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로마 황제나 이방신들, 예컨데 사랍시스(Sarapsis)나 이시스(Isis) 등을 가르키는 의미로까지 확대되어 사용되었다(마르틴 헹엘, 『하나님의 아들』, 164). 그러나 유대인들의 70인역에서는 히브리어로 아도나이(Adonai)를 가르키는 말로써 자주 사용되었다. 이것은 야웨(Jaweh)의 대체어로 사용되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에 대한 특별한 호칭으로 “주”(퀴리오스, Kyrios)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존경을 나타내는 선생(Sir)이라는 표현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 칭호는 존경 이상의 의미를 나타낸다. “주”(the Lord, ho kyrio)라는 칭호는 부활하신 예수에게 적용되었다. 70인역에서 이처럼 사용된 칭호가 부활한 예수에게 적용될 때에는 신적 본성의 의미가 아주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된다(Gutherie, 『신약신학』, 331).
1. 마가의 사용: 예수는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셔서 성에 입성하기 위한 나귀를 구하러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나귀를 사용하는 자를 묻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주”라고 칭하도록 하신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막 11:3). 여기서 “주”(퀴리오스)라는 존칭을 사용하심으로써 예수는 자기 자신을 구약에서 약속된 다윗이라고 소개하신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군중들은 예수를 따르면서 환호한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막 11:9-10). 여기서 군중들이 사용하는 ”주“라는 존칭은 다윗의 영광으로 오시는 정치적 메시아를 지칭하고 있다.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실 때 시편을 인용하시면서, 메시아인 그리스도가 단지 “다윗의 자손”이라는 유대인의 편견을 교정하시고자 하신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막 12:35-37). 예수는 자신의 사역이 메시아 사역이라는 의식(意識)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가 나사렛 예수라는 인물로서 왔다고 보는 것은 옳다. 그러나 예수는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신다.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이라면 왜 다윗은 메시아를 주라고 호칭했는가 질문하신다. 예수는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하신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예수는 시편의 본래 구절의 “여호와”를 “주”로 바꾸어 인용하시고 있다. 그는 이 구절을 성부가 그 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해석하신다. 이 구절은 아주 오래된 시편으로서, 유대 임금의 대관식 때 쓰던 예배의식문의 부분이었던 것으로 추측한다(성경전서 독일성서 공회판, 967). 성전 예언자가 자기 주인 왕에게 여호와께서 그를 나라를 관장하는 자신의 대리자로 세우셨음을 확실히 하는 말씀이다. 이러한 위엄은 그가 하나님의 우편이라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음으로써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발등상이란 굴복한 적의 목을 발로 밟던, 옛 중동의 관습에 근거한다. 예수는 이 시편 말씀을 인용하심으로써 자신이 단지 다윗의 후손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막 12:37). 후기 유대교에서는 이 시편을 사람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에 관련시켰다. 초대교회는 이 시편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과 높아지심에 관련시킨다.   
2. 누가의 사용: 부활하신 예수를 주로 호칭
누가는 예수를 즐겨 “주”(호 퀴리오스, ho kyrios)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세례자 요한 탄생 기사에서 하나님을 “주”로 묘사하고 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제사장 사가랴가 하나님의 제단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때 천사가 나타난다: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눅 1:9-11). 하나님의 성소를 “주의 성소”, 하나님의 사자를 “주의 사자”라고 호칭하고 있다. 천사는 사가랴의 아내에게 여태까지 수태하지 못한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나을 것인데,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고 명한다: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여기서 누가는 하나님을 “주”라고 호칭하고 있다. 
누가는 예수의 부활과 관련하여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엠마오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엠마오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져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주”라고 호칭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눅 24:33-34). 엠마오의 두 제자도 자기들이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증언하였다(눅 24:35). 
3. 마태의 사용: 그리스도는 다윗의 주
마태에 의하면 예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과 관련하여, 사람들이 자신을 “주”라고 호칭하는데 이 호칭만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들어간다고 가르치고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7:21-22). 이 때의 “주”라는 호칭도 존경의 호칭보다는 일반적인 주인이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셔서 성에 입성하기 위하여 나귀를 구하러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나귀 사용자인 자신을 “주”라고 칭하신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마 21:3). 이때의 주는 존경의 호칭이기 보다는 일반적인 주인이라는 뜻이다(Gutherie, 333).
마태에 의하면 예수는 바리새인과의 대화에서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지만 실은 다윗의 “주”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예수는 바리새인이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하는 것을 들으시고 시편 110편 1절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신다. “이르시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마22:43-46). 예수는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다면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 이상이며 “다윗의 주”라고 바리새인들을 가르치신다. 여기서 “주”란 신성을 표현하지는 않으나 메시아 직분의 존엄성을 나타낸다(Gutherie, 332). 그리고 “주”란 칭호는 예수의 독립된 하늘의 직분을 가리키는 데 적용된다(Ferdinand Hahn, The Titles of Jesus in Christology, 113)
4, 요한의 사용: 지상적 예수를 주, 부활하신 주를 하나님으로 호칭
1) 지상적 예수를 주로 호칭
복음서 저자 요한은 예수의 복음 사역 초기에 예수께서 직접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세례를 준 것인데, 예수의 세례를 베푸신 것이 세례자 요한의 세례보다 많다는 사실을 바리새인이 들은 사실에 접하였다. 이 사실을 기록할 때 사도 요한은 “주”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요 4:1).
요한은 디베랴 바다 건너편 광야에서 예수께서 축사하신 후 오천명이 떡을 먹던 곳을 표시하는 장면에서 예수에 대하여 “주”라는 존칭을 하고 있다: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요 6:23).
사도 요한은 베다니에 거주했던 죽은 나사로의 다시 살아남에 대한 사실을 기록함에 있어서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를 소개하고 있다. 그녀가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씻긴 사실에 대하여 기록할 때에 요한은 예수를 “주”로 칭하고 있다: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요 11:2).
2) 부활하신 예수를 주 하나님으로 호칭 : 종교다원주의를 거부하는 독특성
사도 요한은 예수 부활을 의심하던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과 자신에게 나타난 체험을 한 후, 도마가 예수를 “주”라는 호칭으로 부른 것을 기록하고 있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이 도마의 고백에서 나사렛 예수의 정체성은 주(퀴리오스)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이라는 신적 본성의 차원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는 역사적 예수가 성자(the Son)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의 모습에서 삼위일체의 모습을 잠재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종교사적인 신적 인물인 제우스(Zeus), 사랍시스(Sarapsis)나 이시스(Isis) 등에 비견할 수 없는 탁월한 존재로 드러난다. 그는 불교에서의 부처나 유교에서의 공자나 이슬람교의 마호메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그는 신적 존재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하나님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적 예수를 앎에 있어서 두 가지 차원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는 역사적 차원으로서 비교종교학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역사적 종교적 인물로서의 예수다. 이 차원에서 예수는 불교의 부처와 유교의 공자나 이슬람의 마호멧과 비교될 수 있다. 그는 하나의 우리와 같은 진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종교적인 인물이었고 하나님을 추구한 선생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역사적 예수의 진실은 다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의 차원이 있다. 이것은 역사를 넘어서는 초역사적 차원이다. 이 차원은 역사적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신앙적 인식의 차원이다. 이 차원에서 드러나는 그의 모습은 그는 하나님의 아들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성자 하나님, 삼위일체의 2위이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역사적 예수의 정체성이다. 이 정체성은 이미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요 17장)에서 그가 드렸던 대제사장적 기도에서 일견될 수 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예수는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이미 영원 전에 성부 하나님과 함께 삼위일체의 영광 속에 계셨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요 17:8). 믿는 신자들은 역사적 예수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아논 줄을 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성경은 오늘날 종교다원주의 시대에서도 예수 주 되심의 유일성을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역사 마지막에 모든 인간과 종교의 교주들, 영매(靈媒)들이 유일한 하나님의 흰 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묵시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본 것을 기록하고 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1-15). 여기서 보좌에 앉아서 심판하신 자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책과 행위책(사망책)을 가지셨다. 행위책에 기록된 자는 자기 행위에 따라 구원을 얻으려는 자들이나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그의 십자가 대속의 피를 믿는 자들이다. 
결론: 퀴리오스 칭호는 나사렛 예수의 유일성을 드러냄
퀴리오스 칭호는 예수의 존귀를 나타낸다. 퀴리오스 칭호는 부활하신 예수에게 붙은 칭호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부활했을 때 그의 제자들은 그를 퀴리오스라는 당시의 종교사회학적 존칭어를 사용하여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칭호는 예수를 하나님으로 승귀시키고 있다. 신자들에게 퀴리오스 칭호는 신자의 삶의 모든 측면을 관할하는 예수의 절대적 주권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당시 헬라의 신적 존재나 로마 황제에게 붙는 칭호였으나, 초대교회 신자들은 이를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오로지 부활하신 예수에게만 독특하게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퀴리오스 칭호는 예수의 유일성과 탁월성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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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61586 에서 전문 재인용 하였으며 신앙, 신학, 학술 등에서 저작권법에 저촉 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선용 되기 원합니다. 

2013년 1월 31일 목요일

消日이란 말은 삼가해야 할 말이었음을 書하다.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444054248999280&set=a.111791852225523.16059.100001841278334&type=1&the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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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굳이 아는 체라도 해 보라면,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7&contents_id=15642 를 통하여 그 대강을 알 뿐입니다.” 라고 함이 진솔한 응답일 것입니다. 

그는 “消日이란 말은 참으로 해서는 아니 될 말이다. 나는 소일하며 살지 않았다” 했다니, 우리는 그 말을 찾아 볼 필요가 있으며, 이에 그 말이 의미하는 ①하는 일 없이 세월(歲月)을 보냄 ②어떤 일에 마음을 붙이어 심심하지 않게 시간(時間)을 보냄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게 됩니다. 

위 ①에 의하면 분명 소일이란 말은 사용해서는 곤란합니다. 허나 ②에 의하면 이 말은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 듯 합니다. 다만, 이덕무의 견해가 ①에 따르는 말로 당대에 이해되었다 하니 긍정적으로 수용하여 가능하다면 이런 용어는 사용치 않음이 ②의 어의와는 별개로 요청되지 싶습니다.

어제 페부커는 현대 교회 안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지도자 한 분의 머슴론 사용 삼가에 대한 페부킹을 하였고 이에 불면지간의 페부커로부터 견해를 묻는 댓글을 받았습니다. 이에 다소 호흡을 고르는 동안 스스로 댓글이 사라진 것을 보았습니다. 자칫 삼가야 할 소일이란 단어가 일반에 해당한다면, 머슴론은 목회자들이 삼가야 할 마음이 언어면 족하다는 생각이 본 포스팅을 하게 되었습니다.

페부커의 글 하나 의견 하나 하나가 단지 하루 이틀에 가벼이 업데이트 되는 것은 결코 아니란 점을 커뮤니터들께서는 느끼시리라 자위합니다. 머슴같이 일하는 그 정신은 좋으나 이 점이 지나치게 부각되면 자칫 오해를 살 일이 있으며, 이는 공동체적으로 지나치게 강조될 사항은 아니란 점을 강변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니 이후로 이 문제에 대해 재론이 있다면 그야말로 소일①에 해당하는 자라 하렵니다. 그렇다고 ②에 해당하니 나는 정당하다는 변명같은 응답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페부커는 아직도 온라인 커뮤니티에 부족한 바가 많으며 오프라인에서도 모자란 점 많기로 온.오프라인을 무론하고 아직도 섭렵해야 할 우리 사는 이야기들에 스스로 접속 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새벽 시간에 페부커는 https://www.facebook.com/groups/394962370522925/
[32/20130201]를 묵상하였습니다. 모든 인생은, 온 세상이 하나님께 속한 줄을 알아 그 하나님을 경외함이 마땅할 것이며, 왕이든 머슴이든 소일 중인 사람이든 오늘도 열심히 자기에게 주어진 그 어떤 일들(악한 일을 하는 자는 돌이켜 회개하고 다시는 그 일을 하지 않아야 할 것 입니다)을 행하는 사람이든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서로를 대하여 화평하고 거룩하게 행한다면, 우리 사는 지구촌이 곳 하나님 주신 에덴동산의 확대된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顯現일 것 입니다. 이를 저해하는 그 어떤 惡한 생각과 行爲는 곧 하나님의 공의로써 심판 받음이 마땅 할 것입니다.

惡은 모양이라도 버리라 하신 말씀을 기얻하며, 오늘도 善한 일을 行하기에 귀히 스임 받는 복된 페부커 제위이기를 축원합니다! 샬롬~ 그리고 샬롬!

2013년 1월 30일 수요일

Strong people, Weak people!


Strong people affirm the strengths of other.
 Weak people attack the strengths of others.

하늘 위로 날아 가는 저 굉음!

하늘 위로 날아 가는 저 굉음!
우리의 KSLV-1일까? ATLAS 5 시리즈물 가운데 하나일까?


이제는 전국적으로 흥분이 잦았을까 그 뒤진 흥분의 지구촌 저 편에서는 '씨~익' 웃으며 마치 어린 아이들 보듯 할 고참들도 있다는 점을 우리 겨레가 깊이 알아야 할 일이려니 합니다. 현각은 20130131 10:40을 지나고 있으며, 예의 그 굉음은 수 분 전에 블로거의 머리를 어지럽히고 날아 갔네요! ^^

구플 블로거 디자인을 섭렵한다는 것은

구플 블로거 디자인을 섭렵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을 온 몸으로 흡입하는 격입니다! 끝 없는 디자인으로의 유혹도 감출 수 없구요! 편의성과 하비리적인 가젯 추가와 템플릭과 에디터의 조화로운 배치로 빚어내는 블로거 디자인의 완성을 위해서는, 여간 정성과 샤프함으로는 결코 쉽지 않다는 결론이지요.

다소 촌티 나는 모양새지만, 왕초보임을 감추지 않고 우선 디자인 변경을 해 봅니다!

step by step~ ^^

나로호 발사 有感!

나로호 발사 전 10분.

외출을 해야 할 형편이었으나 특별히 시청 중이던 방송은 이제 잠시 후면 그 세 번의 도전 비행을 하게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를 어쩌나!

아내를 의자에 지그시 앉혀 어깨를 주무르며 함께 시청하기로 하고 화면을 보게 된 것은 7분 정도 -timing을 카운트 하는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약 3분여 남은 시각이 되었을 때, 도저히 믿기 어려운 가슴 두근거림이 시작 되었습니다. 약간의 통증도 있었다면 이해 못할 분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고 있던 화면에서는 드디어 '0'가 모니터 되었고, 드디어 비상하는 나로호! 사실 카운트 0과 비상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판단일 것입니다. 아뭏든 연무와 수증기에 가린 비행체는 시간 차를 두고 드디어 비상하여 점점 높이 올라 갔고, 21:00 뉴스는 그 사실을 실시간으로 '이상무'라는 상황 보고 보도를 잘 해 주었습니다. 

내일 새벽이면 우리 대전 기지국과의 교신이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최종 발사 성공은 선포 되는 것이라니, 남은 시간들 함께 모니터 하는 대열에 있으면 좋겠으나 좀 오버한다 싶어 그만 두려 합니다. 

현각 22:00을 지나고 있군요......(이렇게 타이밍이 맞는 것도 쉽진 않겠죠? ^^)

블로거는 발사 이후 지난 2006년도 2월 10일자로 부여 받은 KARI 우주인증을 깊숙이서 꺼내 들었습니다. 고유번호 KARI No.20060210. 특별한 법적, 행정적 효능은 없으나, 우리 KARI에서 부여 해 주신 명예우주인증입니다! 아마도 이 증을 소유하신 분은 이것이 무슨 얘긴지들 아실것입니다. ^^

나로호의 비상  이후 이 분야에 야기 될 경제적 창출 효과는 좀 더 가시화, 가속화 될 것을 예상들 하는 분위기입니다. 저녁의 한 시사 토크 프로그램에서는 행정 조직의 독립화, 격상화도 강조하구요! 향후 전 세계적 예상 경제는 수백조대가 예상된다 하니, 이제 바야흐로 지구촌의 우주 항공시대는 영화에서의 시나리오 정도가 아니라 보다 구체화 현실화 되는 시점에 이른 듯 합니다. 


그런데 요는 모두가 이 분야에 긍정하는 분위기는 아니라 하는 것입니다. 왜 왜 왜 하면서 무관심, 일부러 잊으려 함, 그 돈이면 하면서 당장 주변에 산적한 현실 문제에 주목해 달라는 원성에 가까운 탄식입니다. 참 아쉬운 모습입니다. 

블로거의 입장은, 작금의 가장 보수적인 공동체라 할지라도 지구촌이 하나님의 주신 인류에의 아름다운 선물이라면, 이를 발판 삼은 우주 공간으로의 개척과 개발은 인류의 자정 능력이 살아 있는 한 인간에게 부여 된 자유의지의 신세계를 향한 문명론적 진화요 인류의 보편적 도전 정신의 산물이라는 입장입니다. 

목사가, 강단에 서지 않더니 별소리 다한다 하실 분 계신다면, 이미 십 수년 전 부터 해 온 설교와 세계관 그리고 인류관에 대한 마인드를 유념 해 주실 일입니다. 비록 전문적으로 갖추어 지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

오늘은, 피곤하지만 비교적 개운한 날입니다. 내일은 포근하면서도 오누에는 비가 온다는 예보도 있구요! 


Good night every body~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5&oid=014&aid=0002806216


2013년 1월 29일 화요일

[바울과 그의 편지]를 리뷰하다.

[한국기독공보] 이벤트를 통해 단 하루 만에 공급받은 2008년도 발행본.

바울 연구의 역사를 약사 형식으로 기술한 내용과 바울에 관한 일반 연구(바울의 세계), 사도로서의 바울에 관한 신학적 이해와 연구 및 바울이 저술한 서신서들의 대략 등 4가지 세션 형식으로 구성된 본 서는 [바울과 그의 편지]라는 제하에 단행본으로 목회 현장에 있는 김진욱에 의해 저술 되었다.

 [바울과 그의 편지]를 이해하는 핵심은 부엇보다도 그의 복음에 대한 이해와 그(복음) 내용이라 할 것인데, 마침 저자는 "바울 복음의 내용"이라는 테마로 비교적 일목요연히 잘 정리 해 주었다.

1) 기독론을 중심으로 하였다.
2) 예수 사건은 구원 사건이었다.
3) 바울의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자이신 메시야,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 한 사건에 대한 기록이었다.
4) 바울의 복음관은 하나님의 복음, 선지자를 통한 약속, 하나님의 아들에 이었다.
5) 메시야 칭호는 다윗의 씨 다윗의 아들, 다윗의 가지, 하나님의 아들 등으로 묘사 되었다.

기독 사상이나 기독 정신은 차치하고라도, 주관적으로 예수를 만나는 계시적 만남과 그 예수를 객관적으로 만났던 베드로 및 사도즐의 전승을 따라 예수 이해를 하였고 그 예수를 증거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배경들을 분토같이 여겼던 바울과 그의 편지 한 번 깊이 묵상하지 않은체, 창조와 종말이라는 이 영원 전 부터 영원까지의 eternal Life를 다루는 교회 공동체를 폄하하는 일이 이 땅 한반도에서 잔존함은 스스로를 역사적 오류와 객관적 오해를 범하겠다 함 에 다름 없다 할 것이다! 

이해 없는 오해란 얼마나 처량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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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설교 다섯 테마”

I like you: [Pg.4] Blessing Message: [Pg.4] Blessing Message The Testament said...... ------------------------------------------------------------- "El Elohe This Blogger"...




20130127 “산상설교 다섯 테마” (마 7:12) 227/522장
 
마태복음 5-7장을 산상설교 혹은 산상수훈 또는 산상보훈이라 하는데 이견은 없습니다. “The Sermon on the mount"하면 통하는 내용을, 우리 정서에 맞는 번역으로 학자들이 의견을 强化하다 보니,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그 표현도 여러 가지로 표현되는 듯합니다. 아무튼 금일 제목은 그 여러 해석 중 그래도 가장 오래된 해석을 따라 ‘산상설교’라는 표현을 선택하면서, 이 설교 가운데 5가지 테마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사실 금주 설교는 1983년도에 출판되었고, 당대 유행하던 영어서적 읽기의 붐이 한창이었을 때는 미처 구하지 못했다가 신학생 시절이 되어서야 구했던 영어 소책자를 지난 주간에 다시 읽던 중, ‘문학으로서의 성서의 위대성’에 대해 객관적으로 추천해 주신 당시 연세 大 C 교수님의 작품해제를 읽던 부문에서 힌트를 내었습니다.
 
오늘의 다섯 테마는 이렇습니다.
1) 황금률(The Golden Rule)
2) 기도(Prayer)
3) 사랑(Love)
4) 축복(Blessedness)
5) 생활의 염려(The Cares of Life) 등입니다.
 
우선 첫째로 The Golden Rule(마 7:!2)에 관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7:12을 보시면,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하는지 그들은 당신에게 그렇게 할 것입니다 하는 의미의 말씀을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 하였습니다.
 
사실 앞서서 7:7-11을 통해, 특별히 7-8절을 통해 우리는 집요한 기도와 긍정적 사고 및 능동적 인생관에 대한 교훈도 찾으며 9-11절을 통해 도덕적 인간관이나 보편적 윤리관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신앙관까지도 교훈을 받게 됩니다만, 결론적으로 12절에서는 ‘그러므로’ 즉 therefore에 해당하는 총체적 규칙 제안 같은 결론이 나오고 이것은 곧 율법이자 선지자(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격자)와 같은 중량감 있는 내용이 力說되고 있으니, 이 구절이야말로 매우 중요한 구절(passage)이 되는 셈입니다.
 
Gold가 무엇입니까?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비싼 것, 가치 있는 것을 대변하지요? 그러므로 Golden Rule이란 쉽게 변치 않고 값어치 있는 귀하고 가치 있는 Rule, 규칙이란 뜻인데 우리는 이를 ‘황금률’이라 하는 것이지요. 개역이나 개역개정이 번역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하든지 그들은 당신에게 그렇게 할 것입니다. Do to other whatever you would have(like) them to do you.
서로 사랑하며 살 일입니다. 나보다 먼저 남을 낫게 여기면, 남도 자신보다 나를 낫게 여기는 것은 아닌 듯 하여도 과연 그런 것이 인생살이입니다.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라 여겨지시나요? 공의의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길로 지켜보고 계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기도(마 7:7)에 관한 내용입니다. 앞서도 7:7-8에 대해 간단히 언급했습니다만 구하면 반드시 주어질 것이며 찾으면 반드시 찾게 될 것이며 문을 두드리면 반드시 당신께 열릴 것이라는 것은 기도의 능력과 과정 그리고 긍정적 결과를 우리에게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습니다만 금주 말씀은 text인 Testament이전 context인 Stories from the Bible(聖書이야기 : 시사 영어사, 1983)을 읽던 중 본문을 text에서 선정한 경우입니다. NIV의 경우 이 구절은 shall이 will로 번역되어 의지력의 해석에 있어 context인 famous stories book보다 약한 느낌입니다. 비록 context였지만 聖書이야기 역본은 이랬습니다.
 
Ask, and it shall be given to you;
Seek, and you shall find;
Knock, and the door shall be opened to you.
 
분명 will로 해석된 NIV 보다는 shall의 의지적 强化가 눈에 띄는 말씀 해석입니다. 기도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의지적 행동은, 반드시 주어지고, 찾게 되고, 문이 열리게 될 것이라는 분명한 ‘기도의 가치’를 정당화 해 주는 것이지요.
 
지난 주간에는 (페북 성목) 멤버 목사님들 가운데 ‘집요한 기도자’의 예를 포스팅 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막 7:26이후)을 굳이 소개치 않더라도 주님의 이 산상설교에서의 기도의 법칙은 기도의 가치를 새롭게 그리고 명료하게 언급하신 하나님 자신의 요청이려니 합니다. 우리 모두 함께 믿음으로 기도하는 기도의 용사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사랑(마 5:43-48)에 관한 언급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에 대한 가치관은 공정, 공평, 균등, 평등과 같은 보편주의적 사유체계를 요구하시는가 봅니다.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아온 무리는 “이웃은 반드시 사랑하고 적에 대해서는 미워하라”는 가치관을 갖고 있었나 봅니다(마 5:43).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그러나 나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는 기도하라고 말한다”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늘 나라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하고 겸하여서 말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선악을 행하는 모든 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니, 이는 마치 빈부귀천과 의, 불의를 무론하고 모든 만물에 골고루 내리는 비와 같은 것이니 좋으면 사랑하고 싫으면 사랑치 않는 그것이 무슨 사랑이냐 묻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완전해야 한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처럼” 하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You must become perfect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완전한 사랑! 당대 욕을 먹던 세리들도 좋으면 하고 싫으면 않는 그런 가벼운 사랑이 아닌, 무슨 동물 같이 여기던 이방인도 하는 그런 값싼 사랑이 아닌, ‘온전한 사랑’, ‘적군과 핍박자까지도 껴안는 사랑’, 그런 사랑을 行하라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최근 미·북간 핵무기 건으로 양국만이 아니라 동북아와 극동 및 태평양 권 일대가 매우 소란해 졌습니다. 저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 방법이 공의의 채찍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껴안아야 할 인내의 침묵이어야 할지는 이제 국제사회 관계 안에서의 북한 최고지도부의 선택의 문제인 듯합니다. 그 정도로 대한민국이나 주변 열국들의 반응은 냉담해진 것입니다. 이에 터지고 찢긴 후 싸매고 위로해 주는 식의 사랑 나눔보다는 나보다 남 낫게 여기는, 지는 것이 이기는 식 사랑이 분쟁 없는 국가 단위의 사랑의 현실로 가시화 되기를 다만 기도하고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남북한 경직도의 최고조 상태에, 하나님의 깊숙하신 간섭과 친권적인 물리적 치리가 있기를 간구하며 진리가 반드시 이길 것을 믿습니다.
 
넷째, 축복(마 5: 3-10)입니다. Blessed로 시작되는 8가지 복에 관한 말씀은, 인간이 인간을 축복하는 입장에서 해석한 祝福축복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복,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에 대한 말씀 해석이 옳을 것입니다. 물론 말씀의 깊은 내막은 고도의 인생관과 생활관을 기독교 윤리적으로 해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 말씀대로의 삶을 사는 것이 결코 쉽지 않으며, 그렇기에 말씀대로 준행하는 자에게 주실 하나님의 축복은 그대로 행동하는 신앙인에게 Blessedness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추구하는 政治的 지향은 福祉國家에 있고, 이는 Well State를 좌표화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Well being life를 추구하는 福祉國家 구현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인간의 욕심은 그 끝이 없음이 선진국가들의 복지 정책에서 이미 실험화 된 줄로 압니다. 따라서 우리 大韓民國形 복지국가는 福祉국가를 너머서서 福祉國家(Blessing Land)를 회복하고 또한 正治的으로 추구함이 중요 현안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숭고한 넋을 잘 계승하고 유지 발전하여 우리 겨fp 자신이 Well State를 만들어갈 뿐 아니라, 우리의 복지국가 시스템을 인류 공영을 위해 이바지하는 나라, 그런 Blessing Land가 된다면 이는 비로소 오늘 본문이 언급하고 있는 우리 주님의 원하시는 바 Blessedness의 충분조건이 되어 비로소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와 은총을 갑절로 받을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역사 200여년(카톨릭 포함)에 우리 대한민국은 얼마나 엄청난 발전이 있었나요? 이것은 곧 복음과 경제적 부흥을 통해 이 놀라운 Blessedness의 은총을 시대지 말에 보다 많은 족속을 향해 잘 베풀어 주는 Israel 국가의 역할을 감당하라는 하나님의 소명 아니겠는지요? 이제 한·이스라엘 수교 50주년을 지나 51주년이 되는 올해 우리는 이스라엘이라는 현대 지구촌 국가 중 한 국가인 이스라엘과 더불어 전 지중해와 이 태평양을 넘나드는 아름다운 나라 美國의 이름으로 불림 받는 참으로 복된 Blessing Nation, Blessing Country, Blessing citizen 되어야 하겠습니다.
 
끝으로 생활의 염려(마 6:25-34)에 관한 내용입니다. 지금 현재 생활의 염려와 경제적 어려움에 있는 분에게 있어 본 절의 말씀은 참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당장 먹고 마실 것과 입고 쓸 것 등 현실에 필요한 물질이 어쩌면 먼저 구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함보다 더 갈급한 것도 사실일테니까 말입니다.
 
사실상 앞서 언급된 공중의 새, 들의 백합에 대한 예증의 말씀은(26,28절)도 어찌보면 있을 때나 끄덕여질 일이지 지금 당장 내게 없으면 이 또한 쉽게 수긍키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context인 Stories from the Bible의 본문 소제는 The cares of Life 즉 ‘생활의 염려’였습니다. 그런데 New International virsion의 동일 본문 소제는 Do not worry입니다. 같은 본문을 놓고도 혹자는 ‘염려(care)'라는 단어를 혹자는 ’don't worry'라는 ‘염려 말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은 아마도 현황에 대한 대응도에서 오는 차이일 것입니다.
 
Bobby Mc Ferrin이라는 음악가의 Don't worry Be happy라는 곡이 있는데 매우 경쾌한 경음악성 곡을 통해 희망적 리듬을 선사해 주고 있습니다.
 
A.S.Pushkin은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는 것이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언제나 슬플 것 모든 것은 한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진다’ 고 노래하면서 염려의 상황을 염려 ‘말라’는 긍정으로의 전환을 예찬하는 모습은, 오늘 주님께서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 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34절) 하신 말씀과 맥을 함께 한다 하겠습니다.
The cares of Life, 생활의 염려로 stress 상태이십니까? 누군가로부터 위로받고 싶고 의지하고 싶나요? 경제적 문제로 어떤 탈출구로든 현실을 도치하고 싶나요? Don't Worry! 염려마세요. 주어진 상황을 솔직하고 투명히 하나님과 사람 앞에 구하고 찾으며 help me 해보세요. 그리고 in spite of, 그럼에도 불구하고 휘파람을 불며 새로이 떠오르는 지혜를 구해보세요.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지혜의 왕,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그 지혜를 구할 뿐 아니라(막 1:15) 이 상항의 반전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능력을 구해 보세요. 반드시 Be happy 해 질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몰려든 수많은 청중들에게 잔잔히 들려주신 다섯 테마 가운데 황금률과 기도, 그리고 사랑과 축복 외에 염려스러우나 염려 말고 하나님께 구할 지혜를 찾아 휘파람을 불 수 있는 하나님의 싱그럽고 복된 자녀요 성도로 나날이 이기시는 자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