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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4일 월요일

경칩에 기억 난 6월의 개구리 이야기!

여기 저기서 경칩 소식과 함께 개구리 이미지들이 업로드 되고 있군요! 다소 계절적으론 다르지만, 6월의 어느 개구리 관련 블로깅 하였던 블로그 포스트 생각이 나기로 한 번 공유 해 봅니다! 

개구리도, 사람이 가까와 지면 다가 오는 情이 있나 싶을 정도로 신기했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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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gjhp3/140070827346


20130303 “하나님의 受洗” (눅3:21-38)


20130303 “하나님의 受洗” (눅3:21-38) 315/313장


누가는 상당한 학문적 수업을 쌓은 지성인으로, 직업은 ‘의사’였습니다. 당시의 학문 중심지였던 다소(Tarsus)에서 의술을 습득한 것으로 보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기록은 목격자들의 증언 자료에 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누가에 대해 ‘사랑받는 의원(골4:14)’으로,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사람(딤후4:11)‘으로 소개하였습니다. 

그가 기록한 또 하나의 사도행전을 통해 많은 성서신학자들은 누가가 ‘성령의 사역’과 ‘기도’에 대해 강조하였고 ‘여인에 대한 관심’을 부각시켰으며 ‘부활 후에 현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 하였음을 언급합니다. 나아가 ‘이방인에 대한 복음 전파와’와 ‘재산(富)에 대한 적절한 관리’가 강조 되어 ‘교회 공동체의 방향’을 잘 이끌어 주었음에 주목합니다.

특별히 누가복음은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인성과 감정 그리고 그 분의 기적, 비유, 교훈 등의 모든 행적에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인간미가 人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또한 거기에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능력과 의지가 잘 조화 되어 나타나고 있지요.

누가복음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뉘어 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선은 눅1:2-4:13에서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개’를 보게 되며,
눅4:14-9:50에서는 ‘인자의 갈릴리 사역’ 그리고
눅9:51-19:27에서는 ‘인자의 배척 당하심’과
눅19:28-24:53에서는 ‘인자의 죽음과 부활’등에 관해 잘 묘사 되어 있습니다.

말씀 각 부분 부분을 읽노라면,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인간과 함께 하셨고 어떤 환경에서 어떤 일들을 당하시고 어떤 대미를 장식하셨는지를 통해 ‘새로운 기다림’을 이 2013년에도 지속할 당위를 찾게 됩니다. 눅24:51-53을 읽어 보시면, 당시 예수그리스도를 경험하였던 그 목격자들의 증언에 근거한 예수 신앙 (기독 신앙)이 오늘 우리의 ‘의미’의 근거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인간이 되셔서 인간계에 오신 ‘하나님의 사역과 의미’를 인간의 지성과 체험 능력 안에서 경험할 guide book으로써 누가 복음을 대하는 것이며 이 지침이 되는 누가복음을 읽으면서 체험하게 되는 하나님의 touch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초월적 역사’ 의 運動인 셈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수세의 본을 보여주신 예수그리스도의 수세는 곧 하나님의 수세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람 touch를 초월한 인간의 하나님 touch를 읽고 보게 되는 셈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구원의 시초가 될 하나님의 방법 제시로써의 세례에 관한 문제를 통해 하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셨다는 논리와 하나님도 받으신 세례를 인간이 거부할 이유 없음에 대해 明示的으로 깨닫게 되는 빙거憑據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 하나는 아직 세례를 받지 못했거나 세례를 받지 않은 자 에 대한 입장이며 또 하나는 이미 세례를 받았거나 받은자(들)에 대한 것입니다.

우선 ‘아직’ 수세하지 못했거나 않은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두 가지의 경우입니다. 아직 믿음이 없어(not believe but faith) 수세를 망성이거나 거부하는 경우예요 전자는 믿음을 구하거나 갖게 되면 매우 순응적이고도 감격적으로 능동적인 수세의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희망이 보이는 모습이죠 허나 후자는 믿음을 가지려 하지도 믿음을 가지고자 하는 자를 향해서도 매우 배타적이고 적대적 자세를 취하곤 합니다. 이 의식 행위를 무시하거나 이상히 여기거나 배척하기도 하지요 절망적입니다.

전자가 희망적임은 기도를 통해, 성경 연구와 지속적인 예배를 통한 말씀으로 부터의 깨달음이 있다면 매우 순적하게 수세에 임할 자요 그리스도인으로써 온전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선 수세자는 저들을 위도하며 믿음 안에서 리드해 주는 친절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고백에 간증이 없거나 형식과 외식에 대한 가치 認知 하에 구원의 확신 없이 수세 할 겨우도 있으므로 스스로의 良心에 따라야 할 것이며 거짓된 수세는 무효 할 것입니다.

절망적인 후자의 경우는 사실 대책이 없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성령의 도우심과 스스로의 선택에 의할 수 밖에 없으므로 인간이 touch 할 수 없는 道 外的인 상황입니다. 그 어떤 성직 수행자도 따를 수 없어요. 불행한 경우이며 매우 안타까운 경우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들은 교만, 권위의식, 불필요한 명예의식, 대중을 의식하는 허영심, 말씀에 대한 배척심, 교회공동체를 향한 적대심, 부족함 없는 생활 환경, 수세 자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타종교와의 갈등에 대한 우려 ‘의미’를 두지 않음, 불확신 하나님 존재에 대한 인정을 하지만 긍정 수용은 하려 하지 않음 등입니다.

전자든 후자든 기억할 것은, 세례를 받기 전 ‘완벽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를 완벽한 믿음으로 규정할 것인가도 애매모호 하지만, 완벽한 믿음의 주체는 ‘나’ 이전에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이미 주신 믿음에의 반응으로 나아감이 세례의 실체임을 기억한다면, 세례의 핵심은 마음으로 믿는 바를 입으로 시인함의 행위적 묘식 행위이자 거룩한 교회공동체 앞에서의 신성한 예식이 비로소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세례’라는 형식과 그 세례를 통해 ‘성령과의 하나 됨’이라는 본질적인 내용이 사실은 세례를 통해 새 생명이 회복되는 가치를 가치 되게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세례를 받지 못한체 주저하고 망설이는 약한 믿음의 소유자는 속히 이 거룩한 예식의 가치를 위해 기도하며 수세에 임할 일이요 여전히 세례의 가치를 업수히 여기거나 훼방하려 하는 분이 있다면, 하나님의 엄존하심 앞에서 자기존재 이유와 생의 유한함을 성찰하실 일입니다.

다음으로 이미 수세자가 되신 분(들)의 경우입니다.

信者가 聖徒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존귀하고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이는 마치 애굽에서의 노예생활 중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입성한 선민이 됨과 같은 논리이니, 세상 그 어떤 물질적 요건으로나 이론적 지식적 사고로도 계산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변화의 통로가 되는 것이 세례 사건이거니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확신으로 세례 받은 성도과 구원함을 받은 성도로 이 세상을 순례함은 주지하는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세례 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광야 같은 세상에서 만나는 신앙의 저해 요인은 결코 만만한 것들이 아닙니다. 따라서 믿음생활 중에도 간혹 세례 당시의 신성함과 거룩함을 잊는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첫사랑의 순수와 감성을 망각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미 세례 받은 성도는 스스로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깨어 경성하며 성도의 마땅한 바 성결의 삶을 정진하므로써 성화의 자리에 이르도록 완주해야 할 것입니다.

앞선 수세 성도로써 나중 된 신앙의 후배를 향해 신앙의 모범과 건덕생활을 경주할 것이요 나아가 세례의 가치와 의미를 권하여 또 다른 수세 성도를 양산함에 힘 쓸 일입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니, 성령의 사람은 마땅히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사랑의 사람인가? 나는 희락의 사람이며 화평의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오래 참으며 자비롭고 양선함으로 덕을 베푸는가? 나는 충성스런 성도의 삶을 경주중이며 온유하고 겸손한지 나아가 절제의 삶을 충만히 살고 있는지 항상 스스로를 살필 일이며 우리의 심판장 되시는 주 예수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이를 때 “잘 했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인정받는 선한 열매 의 주인공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春3월 봄 계절에 맞는 이 생명의 계절에, 세례 받은 성도로서의 복된 자기 성찰이 충만하시기를 애심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당시 시대를 생각해 보십시오. 눅1:1-2을 보시면 시대적으로 참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color로 그려본다면 매우 어두운 시절이요, 日氣로 대비해 본다면 무척 흐리고 답답한 시대였던 상황입니다. 그 힘겹고 지루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통해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게 하셨습니다(눅1:3). 그의 메시지는 매우 단호하고도 단순했으며 청자로 하여금 심령을 움직이게 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눅1:7-14). 그의 선포 앞에서 경청하였던 무리(눅1:7)와 세리들(눅1:12)과 군병들(눅1:14), 그리 숱한 당대 백성들(눅1:15, 21)은 ‘거부할 수 없는 이 회개의 복음 증거’ 앞에서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눅1:21).

바로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 역시 세례를 받으러 요한에게 머리를 숙인 것입니다. 이 상황에 대해 마태는 세례 요한 자신이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하며 말린 모습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기술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3:14-15)” 하심으로서 神이 人間에게 머리 숙여 세례 받으심의 役事를 성취 하셨습니다.

洗禮는, 분명 구원의 예표입니다(벧전3:21).
세례는, 분명 성령과 하나 됨의 증거입니다(고전12:13).
세례는, 진정 그리스도와 합하여 그 그리스도의 옷을 입음입니다(갈3:27).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로 옷 입고 이 땅에 오신 완전하신 인간으로 세례의 현장에 동참 하셨습니다(눅3:21). 하나님께서는, 세례 받는 외적 신앙고백과 표현을 결단하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3:22)” 하는 성령강림을 표적화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 받음=죄 씻음 받음=구원(행22:16)’을 公式化 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는 이렇듯 귀하고 복된 ‘의미’와 ‘가치’와 ‘효험’과 ‘능력’을 동반하며, 하나님께서는 그렇기에 스스로 먼저 인간에게 세례 받으시는 ‘낮아짐’을 통해 ‘영생에 합당한 자’의 ‘세례 받을 당위’를 온 몸으로 力說해 주셨습니다.

3月 ‘고백의 달’에는 성도 여러분 각자의 ‘믿음의 고백’과 受洗의 役事, 세례 받음에의 회고와 상호 권면으로 受洗者와 그 결단이 넘치는, 역동의 계절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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