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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31일 목요일

消日이란 말은 삼가해야 할 말이었음을 書하다.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444054248999280&set=a.111791852225523.16059.100001841278334&type=1&the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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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굳이 아는 체라도 해 보라면,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7&contents_id=15642 를 통하여 그 대강을 알 뿐입니다.” 라고 함이 진솔한 응답일 것입니다. 

그는 “消日이란 말은 참으로 해서는 아니 될 말이다. 나는 소일하며 살지 않았다” 했다니, 우리는 그 말을 찾아 볼 필요가 있으며, 이에 그 말이 의미하는 ①하는 일 없이 세월(歲月)을 보냄 ②어떤 일에 마음을 붙이어 심심하지 않게 시간(時間)을 보냄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게 됩니다. 

위 ①에 의하면 분명 소일이란 말은 사용해서는 곤란합니다. 허나 ②에 의하면 이 말은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 듯 합니다. 다만, 이덕무의 견해가 ①에 따르는 말로 당대에 이해되었다 하니 긍정적으로 수용하여 가능하다면 이런 용어는 사용치 않음이 ②의 어의와는 별개로 요청되지 싶습니다.

어제 페부커는 현대 교회 안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지도자 한 분의 머슴론 사용 삼가에 대한 페부킹을 하였고 이에 불면지간의 페부커로부터 견해를 묻는 댓글을 받았습니다. 이에 다소 호흡을 고르는 동안 스스로 댓글이 사라진 것을 보았습니다. 자칫 삼가야 할 소일이란 단어가 일반에 해당한다면, 머슴론은 목회자들이 삼가야 할 마음이 언어면 족하다는 생각이 본 포스팅을 하게 되었습니다.

페부커의 글 하나 의견 하나 하나가 단지 하루 이틀에 가벼이 업데이트 되는 것은 결코 아니란 점을 커뮤니터들께서는 느끼시리라 자위합니다. 머슴같이 일하는 그 정신은 좋으나 이 점이 지나치게 부각되면 자칫 오해를 살 일이 있으며, 이는 공동체적으로 지나치게 강조될 사항은 아니란 점을 강변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니 이후로 이 문제에 대해 재론이 있다면 그야말로 소일①에 해당하는 자라 하렵니다. 그렇다고 ②에 해당하니 나는 정당하다는 변명같은 응답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페부커는 아직도 온라인 커뮤니티에 부족한 바가 많으며 오프라인에서도 모자란 점 많기로 온.오프라인을 무론하고 아직도 섭렵해야 할 우리 사는 이야기들에 스스로 접속 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새벽 시간에 페부커는 https://www.facebook.com/groups/394962370522925/
[32/20130201]를 묵상하였습니다. 모든 인생은, 온 세상이 하나님께 속한 줄을 알아 그 하나님을 경외함이 마땅할 것이며, 왕이든 머슴이든 소일 중인 사람이든 오늘도 열심히 자기에게 주어진 그 어떤 일들(악한 일을 하는 자는 돌이켜 회개하고 다시는 그 일을 하지 않아야 할 것 입니다)을 행하는 사람이든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서로를 대하여 화평하고 거룩하게 행한다면, 우리 사는 지구촌이 곳 하나님 주신 에덴동산의 확대된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顯現일 것 입니다. 이를 저해하는 그 어떤 惡한 생각과 行爲는 곧 하나님의 공의로써 심판 받음이 마땅 할 것입니다.

惡은 모양이라도 버리라 하신 말씀을 기얻하며, 오늘도 善한 일을 行하기에 귀히 스임 받는 복된 페부커 제위이기를 축원합니다! 샬롬~ 그리고 샬롬!

2013년 1월 30일 수요일

Strong people, Weak people!


Strong people affirm the strengths of other.
 Weak people attack the strengths of others.

하늘 위로 날아 가는 저 굉음!

하늘 위로 날아 가는 저 굉음!
우리의 KSLV-1일까? ATLAS 5 시리즈물 가운데 하나일까?


이제는 전국적으로 흥분이 잦았을까 그 뒤진 흥분의 지구촌 저 편에서는 '씨~익' 웃으며 마치 어린 아이들 보듯 할 고참들도 있다는 점을 우리 겨레가 깊이 알아야 할 일이려니 합니다. 현각은 20130131 10:40을 지나고 있으며, 예의 그 굉음은 수 분 전에 블로거의 머리를 어지럽히고 날아 갔네요! ^^

구플 블로거 디자인을 섭렵한다는 것은

구플 블로거 디자인을 섭렵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을 온 몸으로 흡입하는 격입니다! 끝 없는 디자인으로의 유혹도 감출 수 없구요! 편의성과 하비리적인 가젯 추가와 템플릭과 에디터의 조화로운 배치로 빚어내는 블로거 디자인의 완성을 위해서는, 여간 정성과 샤프함으로는 결코 쉽지 않다는 결론이지요.

다소 촌티 나는 모양새지만, 왕초보임을 감추지 않고 우선 디자인 변경을 해 봅니다!

step by step~ ^^

나로호 발사 有感!

나로호 발사 전 10분.

외출을 해야 할 형편이었으나 특별히 시청 중이던 방송은 이제 잠시 후면 그 세 번의 도전 비행을 하게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를 어쩌나!

아내를 의자에 지그시 앉혀 어깨를 주무르며 함께 시청하기로 하고 화면을 보게 된 것은 7분 정도 -timing을 카운트 하는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약 3분여 남은 시각이 되었을 때, 도저히 믿기 어려운 가슴 두근거림이 시작 되었습니다. 약간의 통증도 있었다면 이해 못할 분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고 있던 화면에서는 드디어 '0'가 모니터 되었고, 드디어 비상하는 나로호! 사실 카운트 0과 비상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판단일 것입니다. 아뭏든 연무와 수증기에 가린 비행체는 시간 차를 두고 드디어 비상하여 점점 높이 올라 갔고, 21:00 뉴스는 그 사실을 실시간으로 '이상무'라는 상황 보고 보도를 잘 해 주었습니다. 

내일 새벽이면 우리 대전 기지국과의 교신이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최종 발사 성공은 선포 되는 것이라니, 남은 시간들 함께 모니터 하는 대열에 있으면 좋겠으나 좀 오버한다 싶어 그만 두려 합니다. 

현각 22:00을 지나고 있군요......(이렇게 타이밍이 맞는 것도 쉽진 않겠죠? ^^)

블로거는 발사 이후 지난 2006년도 2월 10일자로 부여 받은 KARI 우주인증을 깊숙이서 꺼내 들었습니다. 고유번호 KARI No.20060210. 특별한 법적, 행정적 효능은 없으나, 우리 KARI에서 부여 해 주신 명예우주인증입니다! 아마도 이 증을 소유하신 분은 이것이 무슨 얘긴지들 아실것입니다. ^^

나로호의 비상  이후 이 분야에 야기 될 경제적 창출 효과는 좀 더 가시화, 가속화 될 것을 예상들 하는 분위기입니다. 저녁의 한 시사 토크 프로그램에서는 행정 조직의 독립화, 격상화도 강조하구요! 향후 전 세계적 예상 경제는 수백조대가 예상된다 하니, 이제 바야흐로 지구촌의 우주 항공시대는 영화에서의 시나리오 정도가 아니라 보다 구체화 현실화 되는 시점에 이른 듯 합니다. 


그런데 요는 모두가 이 분야에 긍정하는 분위기는 아니라 하는 것입니다. 왜 왜 왜 하면서 무관심, 일부러 잊으려 함, 그 돈이면 하면서 당장 주변에 산적한 현실 문제에 주목해 달라는 원성에 가까운 탄식입니다. 참 아쉬운 모습입니다. 

블로거의 입장은, 작금의 가장 보수적인 공동체라 할지라도 지구촌이 하나님의 주신 인류에의 아름다운 선물이라면, 이를 발판 삼은 우주 공간으로의 개척과 개발은 인류의 자정 능력이 살아 있는 한 인간에게 부여 된 자유의지의 신세계를 향한 문명론적 진화요 인류의 보편적 도전 정신의 산물이라는 입장입니다. 

목사가, 강단에 서지 않더니 별소리 다한다 하실 분 계신다면, 이미 십 수년 전 부터 해 온 설교와 세계관 그리고 인류관에 대한 마인드를 유념 해 주실 일입니다. 비록 전문적으로 갖추어 지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

오늘은, 피곤하지만 비교적 개운한 날입니다. 내일은 포근하면서도 오누에는 비가 온다는 예보도 있구요! 


Good night every body~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5&oid=014&aid=0002806216


2013년 1월 29일 화요일

[바울과 그의 편지]를 리뷰하다.

[한국기독공보] 이벤트를 통해 단 하루 만에 공급받은 2008년도 발행본.

바울 연구의 역사를 약사 형식으로 기술한 내용과 바울에 관한 일반 연구(바울의 세계), 사도로서의 바울에 관한 신학적 이해와 연구 및 바울이 저술한 서신서들의 대략 등 4가지 세션 형식으로 구성된 본 서는 [바울과 그의 편지]라는 제하에 단행본으로 목회 현장에 있는 김진욱에 의해 저술 되었다.

 [바울과 그의 편지]를 이해하는 핵심은 부엇보다도 그의 복음에 대한 이해와 그(복음) 내용이라 할 것인데, 마침 저자는 "바울 복음의 내용"이라는 테마로 비교적 일목요연히 잘 정리 해 주었다.

1) 기독론을 중심으로 하였다.
2) 예수 사건은 구원 사건이었다.
3) 바울의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자이신 메시야,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 한 사건에 대한 기록이었다.
4) 바울의 복음관은 하나님의 복음, 선지자를 통한 약속, 하나님의 아들에 이었다.
5) 메시야 칭호는 다윗의 씨 다윗의 아들, 다윗의 가지, 하나님의 아들 등으로 묘사 되었다.

기독 사상이나 기독 정신은 차치하고라도, 주관적으로 예수를 만나는 계시적 만남과 그 예수를 객관적으로 만났던 베드로 및 사도즐의 전승을 따라 예수 이해를 하였고 그 예수를 증거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배경들을 분토같이 여겼던 바울과 그의 편지 한 번 깊이 묵상하지 않은체, 창조와 종말이라는 이 영원 전 부터 영원까지의 eternal Life를 다루는 교회 공동체를 폄하하는 일이 이 땅 한반도에서 잔존함은 스스로를 역사적 오류와 객관적 오해를 범하겠다 함 에 다름 없다 할 것이다! 

이해 없는 오해란 얼마나 처량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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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설교 다섯 테마”

I like you: [Pg.4] Blessing Message: [Pg.4] Blessing Message The Testament said...... ------------------------------------------------------------- "El Elohe This Blogger"...




20130127 “산상설교 다섯 테마” (마 7:12) 227/522장
 
마태복음 5-7장을 산상설교 혹은 산상수훈 또는 산상보훈이라 하는데 이견은 없습니다. “The Sermon on the mount"하면 통하는 내용을, 우리 정서에 맞는 번역으로 학자들이 의견을 强化하다 보니,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그 표현도 여러 가지로 표현되는 듯합니다. 아무튼 금일 제목은 그 여러 해석 중 그래도 가장 오래된 해석을 따라 ‘산상설교’라는 표현을 선택하면서, 이 설교 가운데 5가지 테마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사실 금주 설교는 1983년도에 출판되었고, 당대 유행하던 영어서적 읽기의 붐이 한창이었을 때는 미처 구하지 못했다가 신학생 시절이 되어서야 구했던 영어 소책자를 지난 주간에 다시 읽던 중, ‘문학으로서의 성서의 위대성’에 대해 객관적으로 추천해 주신 당시 연세 大 C 교수님의 작품해제를 읽던 부문에서 힌트를 내었습니다.
 
오늘의 다섯 테마는 이렇습니다.
1) 황금률(The Golden Rule)
2) 기도(Prayer)
3) 사랑(Love)
4) 축복(Blessedness)
5) 생활의 염려(The Cares of Life) 등입니다.
 
우선 첫째로 The Golden Rule(마 7:!2)에 관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7:12을 보시면,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하는지 그들은 당신에게 그렇게 할 것입니다 하는 의미의 말씀을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 하였습니다.
 
사실 앞서서 7:7-11을 통해, 특별히 7-8절을 통해 우리는 집요한 기도와 긍정적 사고 및 능동적 인생관에 대한 교훈도 찾으며 9-11절을 통해 도덕적 인간관이나 보편적 윤리관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신앙관까지도 교훈을 받게 됩니다만, 결론적으로 12절에서는 ‘그러므로’ 즉 therefore에 해당하는 총체적 규칙 제안 같은 결론이 나오고 이것은 곧 율법이자 선지자(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격자)와 같은 중량감 있는 내용이 力說되고 있으니, 이 구절이야말로 매우 중요한 구절(passage)이 되는 셈입니다.
 
Gold가 무엇입니까?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비싼 것, 가치 있는 것을 대변하지요? 그러므로 Golden Rule이란 쉽게 변치 않고 값어치 있는 귀하고 가치 있는 Rule, 규칙이란 뜻인데 우리는 이를 ‘황금률’이라 하는 것이지요. 개역이나 개역개정이 번역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하든지 그들은 당신에게 그렇게 할 것입니다. Do to other whatever you would have(like) them to do you.
서로 사랑하며 살 일입니다. 나보다 먼저 남을 낫게 여기면, 남도 자신보다 나를 낫게 여기는 것은 아닌 듯 하여도 과연 그런 것이 인생살이입니다.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라 여겨지시나요? 공의의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길로 지켜보고 계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기도(마 7:7)에 관한 내용입니다. 앞서도 7:7-8에 대해 간단히 언급했습니다만 구하면 반드시 주어질 것이며 찾으면 반드시 찾게 될 것이며 문을 두드리면 반드시 당신께 열릴 것이라는 것은 기도의 능력과 과정 그리고 긍정적 결과를 우리에게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습니다만 금주 말씀은 text인 Testament이전 context인 Stories from the Bible(聖書이야기 : 시사 영어사, 1983)을 읽던 중 본문을 text에서 선정한 경우입니다. NIV의 경우 이 구절은 shall이 will로 번역되어 의지력의 해석에 있어 context인 famous stories book보다 약한 느낌입니다. 비록 context였지만 聖書이야기 역본은 이랬습니다.
 
Ask, and it shall be given to you;
Seek, and you shall find;
Knock, and the door shall be opened to you.
 
분명 will로 해석된 NIV 보다는 shall의 의지적 强化가 눈에 띄는 말씀 해석입니다. 기도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의지적 행동은, 반드시 주어지고, 찾게 되고, 문이 열리게 될 것이라는 분명한 ‘기도의 가치’를 정당화 해 주는 것이지요.
 
지난 주간에는 (페북 성목) 멤버 목사님들 가운데 ‘집요한 기도자’의 예를 포스팅 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막 7:26이후)을 굳이 소개치 않더라도 주님의 이 산상설교에서의 기도의 법칙은 기도의 가치를 새롭게 그리고 명료하게 언급하신 하나님 자신의 요청이려니 합니다. 우리 모두 함께 믿음으로 기도하는 기도의 용사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사랑(마 5:43-48)에 관한 언급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에 대한 가치관은 공정, 공평, 균등, 평등과 같은 보편주의적 사유체계를 요구하시는가 봅니다.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아온 무리는 “이웃은 반드시 사랑하고 적에 대해서는 미워하라”는 가치관을 갖고 있었나 봅니다(마 5:43).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그러나 나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는 기도하라고 말한다”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늘 나라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하고 겸하여서 말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선악을 행하는 모든 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니, 이는 마치 빈부귀천과 의, 불의를 무론하고 모든 만물에 골고루 내리는 비와 같은 것이니 좋으면 사랑하고 싫으면 사랑치 않는 그것이 무슨 사랑이냐 묻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완전해야 한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처럼” 하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You must become perfect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완전한 사랑! 당대 욕을 먹던 세리들도 좋으면 하고 싫으면 않는 그런 가벼운 사랑이 아닌, 무슨 동물 같이 여기던 이방인도 하는 그런 값싼 사랑이 아닌, ‘온전한 사랑’, ‘적군과 핍박자까지도 껴안는 사랑’, 그런 사랑을 行하라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최근 미·북간 핵무기 건으로 양국만이 아니라 동북아와 극동 및 태평양 권 일대가 매우 소란해 졌습니다. 저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 방법이 공의의 채찍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껴안아야 할 인내의 침묵이어야 할지는 이제 국제사회 관계 안에서의 북한 최고지도부의 선택의 문제인 듯합니다. 그 정도로 대한민국이나 주변 열국들의 반응은 냉담해진 것입니다. 이에 터지고 찢긴 후 싸매고 위로해 주는 식의 사랑 나눔보다는 나보다 남 낫게 여기는, 지는 것이 이기는 식 사랑이 분쟁 없는 국가 단위의 사랑의 현실로 가시화 되기를 다만 기도하고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남북한 경직도의 최고조 상태에, 하나님의 깊숙하신 간섭과 친권적인 물리적 치리가 있기를 간구하며 진리가 반드시 이길 것을 믿습니다.
 
넷째, 축복(마 5: 3-10)입니다. Blessed로 시작되는 8가지 복에 관한 말씀은, 인간이 인간을 축복하는 입장에서 해석한 祝福축복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복,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에 대한 말씀 해석이 옳을 것입니다. 물론 말씀의 깊은 내막은 고도의 인생관과 생활관을 기독교 윤리적으로 해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 말씀대로의 삶을 사는 것이 결코 쉽지 않으며, 그렇기에 말씀대로 준행하는 자에게 주실 하나님의 축복은 그대로 행동하는 신앙인에게 Blessedness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추구하는 政治的 지향은 福祉國家에 있고, 이는 Well State를 좌표화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Well being life를 추구하는 福祉國家 구현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인간의 욕심은 그 끝이 없음이 선진국가들의 복지 정책에서 이미 실험화 된 줄로 압니다. 따라서 우리 大韓民國形 복지국가는 福祉국가를 너머서서 福祉國家(Blessing Land)를 회복하고 또한 正治的으로 추구함이 중요 현안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숭고한 넋을 잘 계승하고 유지 발전하여 우리 겨fp 자신이 Well State를 만들어갈 뿐 아니라, 우리의 복지국가 시스템을 인류 공영을 위해 이바지하는 나라, 그런 Blessing Land가 된다면 이는 비로소 오늘 본문이 언급하고 있는 우리 주님의 원하시는 바 Blessedness의 충분조건이 되어 비로소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와 은총을 갑절로 받을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역사 200여년(카톨릭 포함)에 우리 대한민국은 얼마나 엄청난 발전이 있었나요? 이것은 곧 복음과 경제적 부흥을 통해 이 놀라운 Blessedness의 은총을 시대지 말에 보다 많은 족속을 향해 잘 베풀어 주는 Israel 국가의 역할을 감당하라는 하나님의 소명 아니겠는지요? 이제 한·이스라엘 수교 50주년을 지나 51주년이 되는 올해 우리는 이스라엘이라는 현대 지구촌 국가 중 한 국가인 이스라엘과 더불어 전 지중해와 이 태평양을 넘나드는 아름다운 나라 美國의 이름으로 불림 받는 참으로 복된 Blessing Nation, Blessing Country, Blessing citizen 되어야 하겠습니다.
 
끝으로 생활의 염려(마 6:25-34)에 관한 내용입니다. 지금 현재 생활의 염려와 경제적 어려움에 있는 분에게 있어 본 절의 말씀은 참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당장 먹고 마실 것과 입고 쓸 것 등 현실에 필요한 물질이 어쩌면 먼저 구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함보다 더 갈급한 것도 사실일테니까 말입니다.
 
사실상 앞서 언급된 공중의 새, 들의 백합에 대한 예증의 말씀은(26,28절)도 어찌보면 있을 때나 끄덕여질 일이지 지금 당장 내게 없으면 이 또한 쉽게 수긍키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context인 Stories from the Bible의 본문 소제는 The cares of Life 즉 ‘생활의 염려’였습니다. 그런데 New International virsion의 동일 본문 소제는 Do not worry입니다. 같은 본문을 놓고도 혹자는 ‘염려(care)'라는 단어를 혹자는 ’don't worry'라는 ‘염려 말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은 아마도 현황에 대한 대응도에서 오는 차이일 것입니다.
 
Bobby Mc Ferrin이라는 음악가의 Don't worry Be happy라는 곡이 있는데 매우 경쾌한 경음악성 곡을 통해 희망적 리듬을 선사해 주고 있습니다.
 
A.S.Pushkin은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는 것이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언제나 슬플 것 모든 것은 한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진다’ 고 노래하면서 염려의 상황을 염려 ‘말라’는 긍정으로의 전환을 예찬하는 모습은, 오늘 주님께서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 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34절) 하신 말씀과 맥을 함께 한다 하겠습니다.
The cares of Life, 생활의 염려로 stress 상태이십니까? 누군가로부터 위로받고 싶고 의지하고 싶나요? 경제적 문제로 어떤 탈출구로든 현실을 도치하고 싶나요? Don't Worry! 염려마세요. 주어진 상황을 솔직하고 투명히 하나님과 사람 앞에 구하고 찾으며 help me 해보세요. 그리고 in spite of, 그럼에도 불구하고 휘파람을 불며 새로이 떠오르는 지혜를 구해보세요.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지혜의 왕,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그 지혜를 구할 뿐 아니라(막 1:15) 이 상항의 반전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능력을 구해 보세요. 반드시 Be happy 해 질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몰려든 수많은 청중들에게 잔잔히 들려주신 다섯 테마 가운데 황금률과 기도, 그리고 사랑과 축복 외에 염려스러우나 염려 말고 하나님께 구할 지혜를 찾아 휘파람을 불 수 있는 하나님의 싱그럽고 복된 자녀요 성도로 나날이 이기시는 자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지막 생의 마무리가 가장 아름답고 명예롭게 됨은 하나님의 주신 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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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0130129]
"너희는 모이라...... 너희는 모여 들으라"(창49:1-2)

야곱의 기력이 그만하여 숨을 거두기 직전 12명의 아들들에게 "모이라. 오며 들으라" 언급하고, 그렇게 모인 아들 각자에게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한 것(창49:28)은 매우 고무적이며 인생의 마지막이 얼마나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던가에 주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중 마지막 생의 마무리가 가장 아름답고 명예롭게 됨은 또한 하나님의 주신 분복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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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28일 월요일

"인애와 성실함으로(kindness and faithfulness)내게 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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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0130128]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내 손을 네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kindness and faithfulness)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창47:29)"

아버지 야곱은 자식인 요셉에게 인애와 성실로 대하여 주기를 원하고 있다. 사실 이는 易設的인 묘사가 아닐 수 없다. 자식에 대한 아비의 인애와 성실함에 익숙한 것이 성서적 교훈으로 일반에 각인된 것이 사실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 아비의 입장에서 자식에게 그(자식)의 인애와 성실을 요청 중이다!

사실상 야곱의 이 당시 연령은 147세를 훌쩍 넘은 시기이다(창47:28). 그 파란만장하거나 영욕의 세월은 어찌 되었든, 요셉에게 의지하고 있는 야곱은 지금 노년의 몸으로 청년 요셉(사실 이 때의 요셉의 연령은 56세로, 그도 청년을 지나 장연 혹은 중년의 세월이었다)이 큰 의지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입장의 야곱이 요셉에게 단순히 의지만 하기보다는 그(요셉)로부터 확약을 받아 심신의 안정을 얻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야곱이 요셉에게 청한 '인애와 성실'이란 표현은 개역 성경에서는 '인애와 성심'으로 표기 되었다. 무엔가? 仁愛는 말 그대로 인자함과 사랑하는 마음이다. 또한 誠心은 뜻을 다하는 마음이다. 다시 말하여 "너 요셉은 나에게 인자한 언행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스레 공궤 해 주기 바란다" 하는 요청인 것이다. kindness 즉 친절하고 faithfulness, 믿음직스럽게 나를 모셔달라는 것이다. 참 쉽지 않은 주문이다. 

현대인들로서는 가당치 않게 여겨질 정도의 주문이다. 요양원으로 보냄 받지 않기만 하여도 감지덕지하다 이를 정도로, 현대판 고려장에 가까울 정도로 심각해 져 버린 노인 문에가 현안인 우리에게 있어 야곱의 주문은 어쩌면 참 부담스러운 요청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야곱은 그의 아들 요셉에게 당당히 그렇게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 한 때는 잃어버렸던 아들, 그의 생사도 몰랐었을 뿐 아니라 그(요셉)의 파란만장하고 억울했던 종살이를 생각하면 요셉이 나 몰라라 해도 시원치 않을 입장이었을텐데.......

우리는 여기서 이해나 상식 그리고 현대 지성주의나 합리주의적 의식으로 이들을 이해하려 한다면 참 이해가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인륜과 도덕 그리고 천륜과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이를 넉넉히 이해하고 나아가 지극히 보편 타당한 것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이 오늘 요셉을 향한 야곱의 모습이니, 이는 '복 받을만한 요셉의 인품'이나 '그런 자녀로 만들어 가는 아버지 야곱'이나 넓고 넓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인 것이다.

다소 力설的인 시각에서 이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 성도에게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한 듯 싶다.  당신의 인애와 성심으로써 하나님은 그의 외아들 예수까지도 희생하시지 않으셨는가! 그러한 하나님께서 지금 그 예수로 인해 새로와 진 구원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모습,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가 올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 물으시며 또한 당신을 사랑하여 주기를 워하시고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

1월의 달력이 이제 수일이면 가고 없어질 새 해의 행진은 어느덧 2월이 목전이다.

이 신속히 흐르는 인생사에 있어, 요셉이 아버지 야곱으부터 인애와 성실을 요청 받았다면, 우리 또한 창조주이시자 만유의 주재이신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신실한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요청 받고 있지는 않은가?


2013년 1월 27일 일요일

"무화과 나무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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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7 "무화과 나무의 은혜" 제하 부평소망 發 말씀을 나눕니다! 

2013년도 1월 끝 월요일 아침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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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8]
영국의 일기가 이럴까? 

스산할 정도로 으스스한 닐기와 차가운 공기는, 영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에서 등장하는 그 특유의 스모그 현상 완연한 기운의 일기와 하등 다를 바 없는데, 올 겨울에는 바로 그런 분위기를 자주 접하는 듯 합니다. 

그래도 글짓는 현각의 일기는 다소 맑게 개이고 있는 중이며, 온도도 차갑지만 어깨는 펼만 한, 청량감마저 드는, 새 소리 들리는 아침입니다. 지절대는 참새 소리나 이름 모를 지역의 작은 새들의 소리도 청아하지만, 까치들의 반갑다고 두 세번 혹은 서너 번씩 울어 예는 소리는 왠지 기분 좋게 하는 아침이기도 하지요.

09:00을 가리키고 있는 컴퓨터의 시각은 묘하게도 정확한 타이밍 안에서 글짓고 있다는 그냥 막연하지만 은근한 희열까지도 있습니다. 

한국학술정보에서 수 년 전부터 보내오는 메일링을 보노라면, 한 번씩 출판에 대한 욕구를 분출시켜 주곤 했으나 출판에 필요한 기본 재정이라도 있어야 운이라도 띄어 볼 터인데 그걸 못하다가, 오늘은 기어이 그에 문의 내용 넣은 입장입니다. '돈이 있어야 출판해서 돈 되면 수지 맞고, 안되면 삐걱거리기 식의 출판'이라면, 분명 출판이든 저작이든 아니함만 못할 터인데, 국가가 전략적으로 밀어 주고 세움 받은 출판 문화의 장을 새로이 써 가겠다는 학술적 노고에는 은근 기대를 겸하여 응할 마음 생깁니다. 향후 어찌 진행되든, 글짓는 이의 마음이 저 독짓는 늙은이의 마음처럼, 읽어 감동 내지 감흥과, 읽어 실천화 되는 작품이기를 원하는 글잡이의 의중이 제대로 세워지기만 한다면, 뭐 그것으로 된 것 아닐까 합니다.


요즘 하도 남의 글, 남의 말을 제 글, 제 말인양 하는 일들이 저열低劣하여 소위 저작권 보호법이란 것으로 글잡이를 보호한다지만, 그것도 비평적 혹은 비판적 시각으로 보면 자기모순과 자가당착에 빠질 오류는 지극히 다분한 듯 합니다. 그러니 아예 그쪽으로는 모르고 사는 것이 숨 쉬기에 좋을 듯 합니다. 


왠지 계속 써 지는 글. 이럴 땐 아예 그만 멈추는 것이 글짓다 체득한 글쓰기의 오류와 함정으로부터의 자기 구원이란 것은 글쟁이들께서는 잘 아실 것입니다. 

오늘은 20130128이고 현각은 09:07이군요. 

오늘도 저 하늘 위로는 정체 모를 비행체가 굉음 하나 가득 울리며 온 두뇌를 흔들어 놓고 지나갑니다! 저저저저~~~~~~런~.